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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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에 실린 역자 해설을 읽고 나서야, 무작정 영어 원문으로 『댈러웨이 부인』 을 읽으려던 시도가 현재 내 수준에서는 다소 무리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문장을 더듬거리며 짚어보는 재미는 분명 있었다. 특히 내가 거의 써본 적 없는 접속사 FOR를 이용한 문장이 많았다. 단어의 맛을 또렷하게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것들의 배치를 통해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정립해둔 말과 질서의 세계를 흘끔이나마 들여다봤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꽃을 사러 나가기로 마음 먹으며 아침을 연 하루는 1923년 6월 중순의 어느 수요일이다. 요일 정보와 '중순'이라는 시기에 근거해 대체로 6월 13일과 20일이 꼽히는데 검색해보다 '그 수요일'이 실제가 아닌 어느 가상의 하루임--13일도 20일도 될 수 없음을 여러 근거를 들어 정리한 자료가 있는 것도 알게 되어 재밌었다(솔직히 나는 도입부만 읽어봤다).

이 이야기 속에서 시선과 초점은 끊임없이 한 사람에서 다른 누군가에게로 옮겨간다. 그래서 그게 누구였다고? 지금 누가 이야길 하고 있는 중이지? 하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읽었다. 『댈러웨이 부인』 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끌린 이는 '미스 킬먼'이었다. 그는 이 댈러웨이 집안에서 일을 돕고 있는데 그가 속으로 클라리사 댈러웨이를 평가하는 대목이 재밌다. 그는 '(특히 여성에게) 정당한 노동이 덕목이 아니던' 그 시대에도 일찍이 노동으로 자신의 삶을 착실하게 꾸려온 인물이다.

미스 킬먼은 부인에게 잘 보일 뜻이 전혀 없었다.

평생 자기 밥벌이는 해오지 않았나.

근대사 지식은 극히 완벽했다.

얼마 안 되는 수입에서나마 얼마간을 떼어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쓰고 있었다.

반면 이 여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제 딸을 키웠을 뿐이다.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 중

미스 킬먼은 자신이 돌보고 가르치는 클라리사의 딸 '엘리자베스'를 자식처럼 생각하며 어떻게든 현재의 여성들이 밟아가는 삶의 양상에서 벗어나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길 바라고, 엘리자베스 역시 체제에 고분고분 순응하며 사는 성정은 아니지만 둘 사이에는 미묘하게 어긋나는 지점들이 있다.

법학, 의학, 정치, 당신 세대 여성들에게는

어떤 직업이든 열려 있어요, 미스 킬먼은 말했다.

킬먼 자신의 인생은 완전히 망쳐버렸으나,

그게 그의 잘못이었겠는가?

그럴 리가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 중

우스갯 농담 식의, 옛 인류가 살던 동굴에 새겨져 있던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같은 말처럼, 근대 이후 이 세계 여성들 사이에서는 이따금 저주처럼 들리기도 하는 마법의 주문, '너는(너만은), 뭐든 할 수 있어.'라는 말이 세대와 세대를 거쳐 꾸역꾸역 전해져 내려왔단 생각이 든다. 언젠가 이 말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 세계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그 계기가 '정말로' 여성이 뭐든 할 수 있게 되면서일지 아니면, 마침내 그 말에 질려버린 여성들이 입을 다물면서일지. 전자이길 소망해본다.

작가가 '말줄임표'를 묘사한 문장도 재밌다.

'자, 다 됐어요.' 레치아는 피터스 부인의 모자를 손 끝으로 빙빙 돌리며 말했다.

'지금은 이 정도로 하고, 나중에…' 그의 말꼬리는 마치 꼭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똑, 똑, 똑, 물이 새는 것처럼 방울져 사라졌다.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 중

남은 것은 창문뿐이었다.

블룸즈버리 하숙집의 커다란 창문,

바로 그 창문을 열어 스스로 몸을 던지는 일의

피곤스럽고도 성가시며 신파극적인 속성이란.

There remained only the window,

the large Bloomsbury lodging-house window;

the tiresome, the troublesome, and rather melodramatic business

of opening the window and throwing himself out.

『Mrs Dalloway』 중

영화 <디 아워스>의 내용을 선명하게 기억하진 못하는데, 적어도 이 장면이 '그 장면'이라는 건 알아챘다.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오늘'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집중해가며 읽다가 결말을 맞이하고 나면 다소 의아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역자 해설에서 소개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에서 작가가 셉티머스 스미스를 클라리사 댈러웨이의 '알터에고'로 기능하게끔, 생전 클라리사를 만나본 적도 없는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삶)을 이해하게끔 설정했음을 알려준다. 영화 속에서는 (스포 주의)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의 또다른 분신 같은 캐릭터인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의 아들 리처드가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다. 모자 관계로 설정해 두 인물의 거리를 좀 더 좁혔다는 느낌이 든다.

또 하나 재밌는 비화는, 이 『댈러웨이 부인』 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빅벤' 시계탑의 시종 소리를 작품 전반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장치로 삼아 한동안 <The Hours>를 『댈러웨이 부인』의 잠정적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는 점이다(열린책들 역자 해설, 최애리). 아마 이 제목을 그대로 가져와 영화의 제목으로 삼은 듯 하다.

영국에 최초로 '서머타임'제가 도입된 것을 언급한 대목도 재밌다. 20년대 영국에는 참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났군, 생각하게 되는 것. 한국에서도 80년대 후반엔가 한 번 실시한 적이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길어봤자 8시 반 전후로 찾아오는 한국의 일몰에 비하면, 여긴 정말 시간을 혼동할 정도로 하절기 낮이 길어, 그야말로 서머타임이 필요한 대륙이다(?). 요즘은 대략 4시쯤 해가 떠서 밤 10시 즈음에 지는 것 같은데 여름이 깊어지면 더 길어지겠지.

윌리엄 월레트씨의 서머타임이라는 대혁명은

피터 월시가 지난번 영국에 다녀간 후로 생겨난 것이었다.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 중

사실 잘못은 그 몸 파는 여자들이나 젊은이들에게 있는 게 아니야,

우리 한심한 사회 제도 탓이지.

리처드는 온갖 생각에 잠겼다,

반백의 머리에 고집스럽고 단정하게 깔끔한 모습으로,

공원을 가로질러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러 가면서.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 중

남편 댈러웨이보다 두 배는 똑똑하면서도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것,

그것도 결혼 생활의 비극 중 하나일 터였다.

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항상 리처드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니.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 중

클라리사의 남편 '리처드 댈러웨이'와 어릴 적 연인 '피터 월시' 두 남자의 입을 빌려 '바른말(?)'을 시킨다는 점도 재밌다.

더 소개하고 싶은 문장이 몇 개 남았는데, 습관적 인용대잔치로 매번 끝나게 될 것 같아 이번엔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1923년 6월 배경이니까 딱 100년 후인 2023년 6월에 다시 읽어보는 것도 좋은 계획이 될 것 같다. 그럼 끝인 줄 모르고 만난 마지막 문장을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 을 통해 전하고 싶던 메시지가 그 무엇보다도 '삶'에 있음을 짐작케 하는 문장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번에도 전치사 FOR를 쓴 문장으로 끝나는데, 책 본문의 구두점을 살짝 바꿨다. 원래는 피터 월시가 하는 말이다.

'클라리사.'

그가 있은 탓이다.

'It is Clarrissa,'

For there she was.

『Mrs Dalloway』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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