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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권형술 / 바다출판사 / 1997년 11월
평점 :
품절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는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에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즐거운 편지 중에 있는 내용을 영화 <편지>에서 박신양이 최신실에게 사랑의 고백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가슴 저미는 사랑을 담채화처럼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보다는 책으로 읽은 것이 내용적으로 가슴을 적셔오는 것 같다.
수목원 연구원 환유와 대학원생 정인 둘은 우연히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지만 남자가 뇌종양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여기까지는 수많은 필름이 변주해온 불치병 러브스토리 쯤이다. 그러나 남자가 죽은 뒤부터 누선은 무사하지 못하다.
사랑의 깊이가 사랑의 끝에 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짧은 투병중에도 얼마 남지않은 시간을 남자 곁에서만 보내겠다는 여자의 소망을 마다했던 남자. 무덤을 남기면 여자가 더 힘들어할 거라며 화장을 부탁한 남자.
그가 한 여자를 아끼는 마음으로 해온 일의 자취들 이 홀로 남은 여자 앞에 한꺼풀씩 나타난다.
세상을 떠난 환유로부터 편지가 날아들기 시작한다.
노란 편지함에서 발견된 편지 첫머리는 '정인아 나야… 요즘 힘들지…'로 시작한다.
생사 를 건너뛴 만남의 각별함이 '편지'라는 양식에 따뜻하게 담겨있다.
'편지'속 사물엔 사람의 자취들이 보인다. 그가 늘 태엽을 감아줬지 만 지금은 멈춘 괘종시계, 함께 만들어 지붕에 걸었지만 이젠 내려진 티 셔츠 깃발…. 작은 물건들이 한 남자의 빈자리를 쓸쓸하게 드러낸다.
라스트, 환유가 세상 떠난 몇년 뒤 벌판 전나무 앞으로 정인과 아들이 다가온다.
남자의 화장한 재를 뿌렸던 나무, 남자의 화신같은 전나무 가지 에 정인이 어린 아들을 조용히 악수시키는 장면이 마지막 누선을 찌른다.
각박한 세상에서 사랑하나만을 믿고 결혼한 여자와 결혼생활의 만족감을 주기도 전에 떠날수 밖에 없는 남자.
떠나면서도 오직 그 여자만을 생각하고 아파해온 남자.
이 책은 사랑을 시작하려고 하는 남녀에게 꼭 권장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