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일기장을 몰래 읽었습니다
김은진 지음 / 이다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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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메모하는 걸 좋아한다.

꽤 어릴 때부터 다이어리를 사서 써 왔고 내 다이어리는 매년 한 권씩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이 습관은 지금도 수첩과 펜을 가지고 다니는 아빠에게 온 것으로 내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 아빠의 수첩과 펜, 그리고 전화를 하거나 혼자 계실 때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계신 아빠의 모습이 선명하다.

                                    

아빠 일기장이었다.

"와! 아빠가 이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

오빠와 나는 오래된 일기장이 혹시라도 찢어질까 봐 조심조심 넘겨보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몰랐던 아빠의 인생을 이렇게 마주하다니. 분명 우리 집에 이렇게 남아 있다는 것은 이사하면서도 귀중하게 챙겨 놓았다는 건데…….

아빠가 자신의 일기장을 보여주거나 언급한 일은 내 기억에 없었다. 아빠의 성격대로라면 어렸을 때부터 이 일기장을 수시로 보여주면서 과거 이야기를 해주었을 텐데 말이다. 생각할수록 미스터리였다.

일기의 시작은 고등학생 때이고, 마지막 일기를 살펴보니 엄마와 결혼 전이다. 나의 아빠가 아닌 '인간 김종호'의 이야기. 아빠가 오롯이 자신만의 인생을 살았던 그 시간이 이 한 권의 일기장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일기장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부슬부슬 온다. 기분이 좋지 못하다.

아직은 학교생활에 익숙하질 못하다고 느낀다.

-1972년 3월 16일

오늘은 아침부터 마음이 뜨는 것 같다. 괜스레 기분이 좋다.

누구와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항상 이 상태를 유지했으면 한다.

나는 내성적이므로 말을 잘 안 한다. 그리 명랑하지 못하다.

누구 말대로 수양이 덜 된 모양이다.

-1972년 3월 25일

처음에는 마냥 놀라고 신기했던 마음이 점점 요동쳤다. 아빠가 한 글자씩 일기를 적어 내려가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밤마다 일기장을 펼쳐서 자신의 마음을 적어 내려가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비밀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모습을. 글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읽을수록 눈물이 나서 제대로 끝까지 읽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아빠의 인생을 마주한다는 상황에 울컥했다.

-p.018~019 '아빠 일기장과 만난 날'中

어린 시절 아빠의 손을 많이 타면서 자라온 기억이 있어 아빠의 영향을 참 많이 받았다.

외모도 외탁보다는 친탁을 많이 한 편이고 아빠의 성격과 습관 등을 많이 닮았는데 그중에 아빠를 따라 자연스럽게 익힌 메모하는 습관은 지금도 아빠에게 무척이나 고맙다.

어릴 적에는 수업의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종호스쿨'을 꽤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못해도 혼나지 않고 잘한다고 칭찬만 받는 애정 가득한 학교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모의 사랑과 시간을 온몸으로 누렸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다가도 곧잘 뭉클하고 애틋해진다. 내가 만약 부모가 된다면 이렇게 내 온 에너지를 아이에게 바치면서 살 수 있을까? 내 시간에 대한 아쉬움 없이, 내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즐겁게 청춘의 한 시절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을까? 아직은 자신이 없다.

-p.031~032 '웰컴 투 종호스쿨'中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블로거를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이 습관에 기인한다.

손으로만 쓰고 나 혼자만 쓰는 다이어리에서 발전한 게 이 블로그라고 할 수 있다.

아빠에서 오빠와 나에게 이어진 기록하는 습관은 우리 남매에게 어릴 때부터 자연스러웠던 것 중 하나였는데 성장하면서 어른이 되고 나서 이 습관이 생각보다 내 일상에 도움이 되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사실 나는 아빠처럼 돈에 대한 큰 상처나 서러움은 없다. 기껏해야 갖고 싶은 걸 마음대로 사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비싼 음식점 앞에서 고민하는 정도의 사사로운 일들이다.

아빠와는 다르게 돈에 사무친 기억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건 아빠가 이루어 놓은 기본값 덕분이다. 알뜰살뜰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산 내 부모 덕분이라는 걸 안다. 자식들 밥 굶지 않게 살고, 배우고 싶은 것을 돈 걱정 없이 배우게 하는 것이 목표였던 삶. 아빠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기에 나는 그 앞을 출발선 삼아 시작할 수 있었던 거니까.

"엄마 아빠 노후는 걱정하지 말고, 너희만 신경 쓰면 돼. 너희 앞가림만 잘 하면 된다."

아빠는 지금도 이런 말을 한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안심되다가도 미안하기도 하다. 아빠는 자신이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그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에 오늘도 부지런히 돈을 아끼고 모아둔다.

-p.060~061 '돈과 상처'中

어릴 때는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아빠를 엄청 좋아하고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 아빠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내가 생각하는 거보다 아빠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특히 나는 10대부터 지금까지 일찍 따로 나와 살면서 아빠와 함께 산 시간보다 혼자 떨어져서 살았던 시간이 훨씬 더 길어서 아빠가 좋아하는 색깔이나 음식, 취향 등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자신의 삶을 글로, 그리고 책으로 엮고 싶은 마음이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이 구절을 보고 아빠가 정말 글쓰기에 대한 욕심이 있었구나, 꽤 진지하게 글에 대한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난 후 재미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이미 독립출판물을 두 번 만들어 본 경험이 있으니, 아빠 일기를 그대로 옮겨 책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었다.

자신의 일기가 담긴 책을 받아보면, 자서전은 아니라도 아빠 인생의 한 시절이 담긴 책을 손에 쥘 수 있으리라. 소규모로 100권 정도만 제작해서 주변에 선물도 하고, 독립책방에 입고해서 판매해보는 경험을 아빠도 해보면 일상에 새로운 활력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60대가 분명 젊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내기는 아깝고 아쉬우니까. 아빠의 단조로운 일상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아빠 일기장을 처음 발견했던 날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글쓰기 모임에 가져갔다. 모두가 생각보다 재미있다며 계속 써보라고 했다. 아빠 일기장으로 독립출판물을 만들어 보려고 했던 소박한 계획은 예상하지 못하게 아빠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흘러가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다.

내가 쓰는 아빠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빠가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도 생겼으면 좋겠다. 자판을 누르기에는 불편한 손이지만, 독수리 타법으로라도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는 있으니까.

-p.098~099 '인생작을 기대합니다'中

만나거나 전화 통화를 하게 되면 누구보다 살갑고 껴안고 손잡는 등 스킨십도 많지만 서로의 생활 환경이나 패턴이 많이 달라진 지금은 만나기도 전화 통화도 쉽지 않다.

"이 책을 읽고 한 번쯤은 자신의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면 좋겠다"

그래서 이 책을 만났을 때 내가 모르는 아빠, 아빠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엄마는 황당했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욕을 했고, 아빠는 민망한지 눈물을 감추고 껄껄거리며 웃었다.

둘이 싸우는 걸 보면 도대체 결혼제도는 왜 있으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회의감이 들곤 했다. 저렇게 살지 않으리라 혼자 다짐하기도 여러 번이었고. 그렇게 매일 지겹게 투덕거리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같이 밥 먹으면서 누군가를 흉보거나, 맛있는 걸 먹을 때는 꿍짝이 맞는 걸 볼 때 도대체 부부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해본다.

"풀고 말고도 없어. 맨날 싸우는 게 일상인데 뭐."

이 한마디로 엄마와 아빠의 냉전은 또 끝이 났다.

"그래. 그래도 김미숙 여사밖에 없지."

중얼거리면서 엄마가 있는 식탁 앞으로 가서 앉은 아빠. 이 정도면 해피엔딩인가 싶기도 하고. 물론 이날 하루에도 여러 번의 투닥거림이 더 반복되었다.

아빠는 일기에 제목을 붙이는 걸 좋아했다. 엄마와 연애하던 시기, '가정'이라고 제목을 붙인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쓰여 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젊을 때 결혼하여 살아온 늙은 마누라.'

아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과 매일 함께하고 있으니 누구보다 행복하겠지? 엄마가 이 글을 읽고 났을 때의 반응이 음성 지원된다.

"아주 말은 잘하지! 소중하면 소중하게 대하라고!"

-p.142~143 '사는 게 기적이다2'中

이 책을 통해 작가님의 아버님인 김종호 님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우리 아빠를 생각했다.

가난하고 자식 많은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한 아빠, 뭐가 그리 급하다고 남들보다 훨씬 일찍 결혼해 20대 초반에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아빠, 그리고 지금도 여러 가족들의 생계를 우직하니 책임지고 있는 아빠, 활기차 보이지만 내성적인 아빠, 생각이 많지만 저돌적인 진격의 아빠, 항상 주위에 사람이 있길 바라며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빠, 웃음도 많지만 눈물도 많은 아빠, 아빠를 생각하면 할수록 왠지 눈물이 났다.

 

 

이쯤에서 잠시 우리 엄마를 소개하자면, 김미숙 씨는 김반장 같은 사람이다. 무엇이든 해결해주고 뭐든 척척 잘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그 존재만으로 든든한. 그런 캐릭터가 엄마다.

손수 만들어 내는 음식들도 놀랄 정도다. 그 증거로 우리 집에는 음식과 관련된 다양한 기계가 있는데, 요구르트 만드는 기계, 두부 만드는 기계, 홍삼 달이는 기계, 아이스크림 만드는 기계가 한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렇게 뭐든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거라면 직접 만들어 가족들에게 해먹인 세월이 30년이다.

요리뿐만이 아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새마을금고에서 일하다가 결혼 후에는 화장품 가게를 차려 운영하기도 하고, 각종 부업, 베이비시터, 폐백 음식 출장서비스까지 다양한 직종에서 활발하게 일해 온 사람이다. 어떤 것이든 배우면 해내는, 요즘 말로 '만능캐' 같은 사람이다. 엄마는 나라면 절대 해내지 못할 것들을 해냈다. 자식을 둘이나 돌보면서 거기에 죽어가던 아빠를 살려낸 것도 우리 엄마, 김미숙 씨다.

그런 사람이 자신은 특별히 잘하는 게 없는 것 같다면서 씁쓸해하다니. 마음이 무거웠다. "내게도 재능이 있었을까?"라고 말하는데, 짠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순간 구구절절하게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를 설명하려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엄마가 혹시 배우고 싶은 거나 관심이 가는 거 있으면 뭐든 배워봐~ 인생 길잖아. 백세시대인데!"

애써 웃으며 말을 넘겼다.

"그래 맞아. 근데 다 늙어서 배워 뭐하나 싶고……."

엄마도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어쩌면 나이가 들어도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과 생각은 계속 이어지는 거겠지. 그러면서 엄마도 이제야 자기 자신을 생각할 시간이 주어진 것 아닐까 싶어서 반갑기도 했다.

"이제 다 늙었는데 뭐, 그냥저냥 사는 거지." 대신 엄마의 일상에도 호들갑을 떨만한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자식 뒷바라지, 남편 챙기는 일에서 벗어난 지금, 무탈하게 하루를 끝냈다는 안도감보다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는 그런 일상을 엄마도 누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p.168~171 ''김반장'을 소개합니다'中

주위에 아빠와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들을 보게 되면 나는 그에 반해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우리 아빠는 보수적이지만 나보다 훨씬 그릇이 넓은 사람이고 다정다감한 성격에 고집이 세지만 나에게는 한 풀 꺾어 주는 사람이고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존재다.

나는 아빠를 닮아 어느 부분에선 굉장히 보수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에 고집이 세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개성 강하면서 독립적이지만 몸이 약해 골골거리는 딸인지라 나이를 먹어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아빠의 속을 썩이는 자식이다.

 

작가님의 아버지와 딸인 작가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우리 아빠와 딸인 나를 마주했다.

성별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지만 피가 이어진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이지만 어쩌면 서로를 누구보다 더 모르는 사이인 아빠와 딸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공감과 애틋함을 느낄게 할 거 같다.

'뒤늦게 아빠를 조금씩 이해해가는 딸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오랫동안 아빠를 생각했고 오랜만에 아빠에게 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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