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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조너선 프랜즌 지음, 홍지수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5월
평점 :
월터 버글란드와 패티 에머슨, 리차드 캐츠는 대학에서 만났다. 두 남자와 한 여자는 친구와 연인이고 부부이다. 그들의 조부모와 부모, 자식들 그 사세대의 사람들이 추구했던 자유와 그 만만찮은 댓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에게 있다는 그 '자유'라는 물건(개념)은 '구속'과 '속박'의 다른 말이 아니다. 결과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고 그 자유가 방종과 만나서 낳은 자식들은 도처에서 감당되지 않는 고민거리들로 넘친다. '자유를 선용하라'는 오랜 격언과 충고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 자유를 얼마나 선용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월터는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생을 마친 아버지 탓에 평생 술을 마시질 않는다. 수재였기에 응당 하버드에 가리라고 했지만 낡은 모텔을 운영하는 엄마를 돕기 위해서 전액장학생으로 고향인 미네소타에서 대학을 다녔다.
패티는 변호사인 아버지와 정치가 엄마 사이에 네 남매의 맏이이고 농구선수로 날린다. 엄마가 단 한 번도 자신의 경기를 보러 와 주지 않았음에 내내 화가 나서 일찌감치 분리 또는 독립을 선택했다. 단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월터와의 결혼과 함께 전업 주부가 되었다. 남매 제니퍼와 조이에게는 헌신적인 엄마, 이웃들의 눈에는 따뜻하고 유쾌한 주부였음에도 딸과는 소통이 안되고 아들이 이웃집 코니와 깊은 사이가 되면서 냉소적이고 신랄해졌다.
리처드 캐츠는 롴커이고 감당이 불감당인, 곤란할 정도의 자유인(?)이지만 친구 월터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부모가 없다시피 했던, 가족도 롤모델도 없었던 그에게 월터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을 갖도록 했던’ 유일한 사람이고 월터의 엄마는 그에게도 엄마였음에 틀림없다.
읽는 내내 기중 공감되는 것이 가족사이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오해 부분이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잘 해 보겠다는 것이, 잘한다는 것이 어찌 그리 죄다 상처로 연결되는겐지. ‘그게 아닌데, 내 맘은 그게 아닌데’를 암만 중얼거려봐도 방법이 없거나 모르는 이 요상한 말과 말의 격돌? 아니 향연? 이런 문제는 일상다반사이고 받은 만큼이나 돌려주었을 것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반대로 받은 게 더 많다는 생각이 들면 새삼 벌렁거리고.
형제와 자매, 친구는 인생에서 처음 만나서 끝까지 가는 라이벌이 아닐까.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처지를 보면서 자신의 행복을 실감한다’고 하지만, 이 말은 세계로 넓혀도 될 것 같다. 부모, 형제와 자매, 친구들이 내 삶의 척도였음을 놀래면서 바라보는 것은 동서양와 고금의 차이가 없다. 뉴욕 출신인 패티는 미네소타의 대학으로 가면서 가족들과 확실한 금을 그었다. 월터와 별거중에 아버지의 장례식, 엄마와 동생들, 친척들간의 분쟁 그 와중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자신이 행운아임을 깨닫는다.
월터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좋아했다. 그 또한 한참을 지나 실패한 삶임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어쩌면 아버지를 꼭 닮은 늙은 형을 만나면서 자신이 얼마나 행운아인가를 실감한다. 결국 패티와 월터의 눈금이란 것이 내 가족, 부모와 형제라는 주관적인 척도였다.
패티의 엄마 조이스는 유태인임을 숨기려고 떨리는 목소리를 갖게 되었지만 정작 그녀의 아들 에드거는 자신의 혈통이 주는 반사급부를 챙기기에 열심이다. 손자인 조이는 ¼인 유태인 혈통을 새삼 의식하고 가문에 없던 보수주의자 공화당원이 된다. 소수이지만 확실한 어드벤티지와 프리미엄을 누리는 미국내 유태인의 힘이다.
친구 얘기를 뺄 수가 없다. 월터에게 리처드, 월터의 아들 조이에게는 조나선이 있다. 학생시절 리처드는 월터의 여자친구들에게서 월터가 볼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온갖 헛점을 찾아내서는 꼬장을 부려대었지만 기중에 예외가 패티였다. 오갈 데 없는 리차드에게 호숫가 별장을 빌려주고 일도 준다. 평생 갖어보지 못했던, 친구 부부의 가정적인 삶 옆에서 만들어진 음악들은 음악성도 대중성도 인정받고 자신의 세계를 확보하지만 이런 겉보기와는 달리 월터와 리차드는 질투심과 경외감이라는 애증으로 뭉친 사이다.
조이와 조너선도 대학 기숙사에서 만났다. 다들 가족들을 떠나왔고, 자신들과는 좀 더 뛰어난 듯한 누나들이 있다. 둘이 주고받는 온갖 대화들은 월터와 리차드의 그 시절을 그대로 보여준다. 피차의 성품과 기질로는 가족이라면 참을 수 없지만 친구라서 가능한. '내'오랜 친구를 돌아보면 바로 그 모습이다.
우리는, 나는 자식들을, 부모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을까. 월터의 아버지 진의 장례식에 400명이 넘는 조문객이 왔다. 아들에게는 반가웠던 아버지의 죽음이었지만 400명이 넘는 조문객이 왔던 것을 보면 아버지 진에게도 아들 월터로서는 알 수 무엇이 있었던가보다. 패티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왔던 흑인들과 소외계층들, 그에게서 도움을 받았던 이들의 얘기들은 그녀 또한 아버지를 다시 생각케하는 기회였다.
‘거울을 보면 몇 년 전만해도 저의 큰형님 얼굴이 보이더니 요즘은 갈수록 저의 선친의 얼굴이 보입니다’하는 내 또래의 술회를 들은 적이 있다. 조이는 돈에 관심없는 부모와는 달리 일찍부터 돈버는 일에 발군이다. ‘돈을 거저 번다’라고 할만치. 고지식하고 청렴한, 좋은 사람이었던 아버지를 낙심, 의기소침하게 했던 아들이었지만 소설의 후반부에 가면 아버지와의 평생 대결에서 졌음을 받아들인다. 부모의 역할과 삶, 그 운용 방식을 수긍함으로 자신의 속에서도 그 모습을 만들어간다. 맘이 놓이는 순간이다. 월터와 패티는 그 정도의 자격은 있는 사람들이다.
패티와 리처드는 오랜 시간을 지난 다음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서야 알게 된다. 그 둘이 진정 사랑하는 이는 바로 월터인 것을. 별거 상태가 6년을 넘기던 10월의 추운 저녁 패티와 월터가 화해하는 부분은 참 따뜻하다. 패티가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에서 자신감을 찾고 만들어가는 세계는 바로 나의 그것처럼 여겨진다. 연락두절이었던 리차드가 보내준 솔로 음반에는 '월터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첫 곡의 제목은 '두 자식도 좋지만 무자식이 상팔자'이다. 울며 욕하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르는 월터를 상상해보자.
작가가 궁금해서 돌아다녔더니 인터뷰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의 서술 방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들이 “주제로 다루는 이슈들을 좋아한다”고 한다. “자신의 책에서 하고 싶은 일은 이들 이슈들을 주제로 삼는 것이다. 거기에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인간의 이야기를 다뤄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은 이런 걸 다루고 싶어하지 않는다“ 는 얘기에서 소설을 읽는 내내 푸근했던 열쇠가 있었다. 동세대 미국 작가의 글에서 공감을 일으키는 현실과 상황, 대화들에서 발견된 사람과 삶의 실체라고나 할까.
소설의 첨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소도 사람도 다른, 이웃들의 수다는 이 긴 소설을 멋과 맛이다. 패티와 월터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장치이지만 어찌보면 집중을 방해하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말로 703쪽이니까 영어로는 800쪽이 넘을 분량의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니 참 기분이 좋다. ‘사양산업(김연수)’라는 자조도 있지만 글쟁이도 책벌레도 건재함의 증거일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