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지음 / 달 / 2017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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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클럽 달 7기, 나는 재수생이다.
6기에 도전하였으나, 의도치 않게 나보다 뛰어난 다른 분들에게 자리를 양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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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르지 않고 그걸 가질 수 있던가요.
저지르지 않으면 곧 잃게 되잖아요.
일단 저질러야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그래야 가질 수 있다는 이병률 작가님의 글을 보고 도전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내 스스로가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도전했고, 성공했다.
이 공간을 빌어 작가님께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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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리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조금은 막막하지만,
클럽 달 선배님들의 후기와 리뷰를 읽으며 확실하지는 않지만 희미한 첫 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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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처음 마주할 때 겉표지와 맨 뒷장의, 그러니까 바코드가 찍힌 표지를 읽는다.
그곳에는 밤 하늘에 별빛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어렵게 멀어져 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 봐 등을 돌리고 걸었다
가만히 걷고 바라보다 보면
길이 말을 걸고 풍경에 생각이 움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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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책을 읽고 싶었으나,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그럴 수 없었다.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라는 문장을 보고 어찌 한숨에 내달릴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나는 한 걸음씩 천천히 걷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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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자를 마음에 새기고

싶었으나, 여의치 못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은 장면들만을 골랐고,
이곳에 모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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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20
✔️구부러진 손가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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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게를 자주 찾았던 또 다른 이유는 한 점원을 보기 위해서였다. 계산대에 앉아 있는 사십 대 중반의 그 남자는 장애로 심하게 일그러진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안경 너머로 빛나는 눈은 초식동물처럼 선량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가 자유롭지 못한 입술과 혀로 간신히 무어라 웅얼거릴 때, 나의 귀는 그의 낯선 영어 발음에 친숙하게 반응했다. 키 큰 영국인들이 머리 위로 빠르게 토해낸 말보다는 그의 더듬거리는 말이 오히려 정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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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에는 종일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레퍼토리가 나쁘지 않았다. 흥겨운 곡이 나오면 그의 구부러진 손가락들은 허벅지를 툭 툭 치며 장단을 맞추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을 것이다. 음악 소리를 뚫고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그 마찰음이 내가 더 귀 기울여 듣고 있는 음악이라는 것을. CD를 고르는 동안 내 시선은 그 슬픈 몸의 움직임에 더 오래 머물곤 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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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골라 계산대 위에 놓으면 그의 손가락은 이내 음악에서 풀려나 컴퓨터 자판의 숫자들을 누르기 시작했다. 뒤틀리는 손으로 아주 천천히 숫자 버튼을 눌렀지만, 말을 잘 듣지 않는 손가락들은 자주 에러를 냈다. 그러면 친절한 그의 동료가 달려와 문제를 해결해주곤 했다. 물건을 사려고 기다리는 고객들 중에 그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는 것에 짜증을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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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민 지폐를 받아 넣고, 그는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거스름돈을 건넸다. 크고 작은 동전들이 오그라든 손가락들에서 금방이라도 빠져나올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흔들리는 물통 속의 물처럼 찰랑거리는 동전들. 나는 그 소리가 무슨 노래라도 되는 것 같아서 동전을 지갑에 쉽게 던져 넣지 못했다. 동전을 손에 꼭 쥐고 걸으며 그가 들려준 음악의 여운을 느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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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얼마나 좋으냐고 묻는다면, 그냥 빨리 읽어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읽는 내내 자꾸만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소름이 돋는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한가. 읽기 쉽게 쓰인 글이라 죽 읽어 나아가는데, 머릿속에 그 장면들이 옛 영화관에서나 날법 한 촤르르르륵- 소리를 내며 유유히 지나간다. 앞으로 남은 페이지 수는 약 180페이지. 이제 시작이지만, 천천히 아껴두고 오래오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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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8-39

✔️묘비 대신 벤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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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책하다 즐겨 앉던 벤치에는 사람 이름 대신 'Que sera sera'라는 글자만 음각되어 있다. 마음이 무겁거나 우울할 때 그곳에 앉아 도리스 데이의 그 노래를 혼자 읊조리다 보면, 마음 한끝에서 밝은 기운이 생겨나곤 했다. 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같았다. 눈앞에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냥 흘러가라고, 괜찮다고,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놀랍지 않은가, 평범한 의자에 적힌 한 문장이 그런 위로를 베풀어준다는 것이.

그날 저녁 산책에서 돌아와 아이들에게 제법 비장하게 말해두었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 양지바른 언덕이나 강가에 묘비 대신 벤치를 놓아달라고. 죽어서도 차가운 대리석 묘비보다는 나무의자가 따뜻할 것 같다고. 그 벤치에 누군가 앉아 생각에 잠겼다 가거나 사랑을 나누어도 좋겠다고. 아니면 오늘처럼 아무도 앉지 않고, 종일 흰 눈만 소복하게 쌓여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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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2.
새들의 집은 아주 작고 가볍다.
특히 대지에 뿌리내리지 않아도 되는 물새 둥지는 수초처럼 늘 흔들린다. 새들의 자유는 이렇게 정주의 욕망이 없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왜 인간은 대지에 뿌리내리는 일로부터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이면 수많은 창문들을 올려다보며 그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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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무섭게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높은 아파트를 바라보면서. 이미 지어져 하늘에 닿을듯한 수많은 네모 속에 살고 있는 저들을 보면서, 저렇게나 많은 집이 있는데. 어찌하여 내 집은 없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느 날 출근길에 높은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까치 부부를 만났다. 부리로 열심히 집을 다듬고, 쉴 틈 없이 나뭇가지들을 실어 날랐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한 평생 살아갈 집을 자기 손으로 짓는 것이 이리도 힘들까, 하는 생각을 했다. 슬펐다. 그날은 오늘과는 조금 달랐다. 출근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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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천천히 읽고 있는 중이다.
한꺼번에 다 읽어버리면 너무 아까울 것 같아서.
어렵지 않고 죽 읽히는 글.
그 글이 머릿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하나의 이야기처럼 필름이 이어진다.
편안하고 따뜻하고 새로운 시선.
남은 페이지가 얇아질수록 읽는 속도가 점점 더뎌지는 느낌.
당신도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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