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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김남주 옮김 / 작가정신 / 2000년 3월
평점 :
절판
대학 친구 중에 늘 연애를 하고 싶어하지만 매번 여자를 만날 때마다 '자학에 의한 파국'이라는 별리의 공식이 따라다니는 녀석이 있었다. 게다가 녀석은 습관처럼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을 되뇌이곤 했는데 '피살'되어야 할 대상은 언제나 상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구를? 아마도 자기 자신 아니었을까?
자학이라는 병적 증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자기존재와의 불화라는 고질적 악순환에 시달린다. 자기존재와의 불화? 그건 상식적(혹은 비상식적) 세계와 대면하는 비상식적(혹은 상식적) 자아가 겪는 자기동일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마음이 지향하는 바와 실제로 움직이는 바가 달라서 언제나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에 무릎을 꿇게 된다.
《새 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에 나오는 <아이를 먹는 식인귀>와 <아이를 지우는 화학자>라는 작품은 바로 이런 불화하는 존재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어린아이'일까? 어린아이는 세상과 교통하는 방식에서 가장 상식적인 존재이자 가장 비상식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두 요소는 언제나 조화롭게 공존하며 세상과 불화하지 않는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두 경계가 분명해지면서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를 먹는 식인귀>의 발튀스는 식인귀의 운명을 긍정하는 자아와 부정하는 자아의 대립양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들어가보면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면서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에서 불화하는 어른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발튀스가 아이를 먹으면서 태연하게 사회의 엘리트로 살아간다는 것은 두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를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평에서 경계 없는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단죄(?)받는다. 발튀스는 단죄받는다. 아니 스스로를 단죄한다. 하지만 자신의 육신을 수많은 아이들에게 먹임으로써 '경계 없는' 순수한 삶을 영속적으로 대물림시킨다. 이제 발튀스의 고기를 먹은 아이들은 결코 '경계 지우는' 삶을 살아가는 어른으로 성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발튀스는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 실제로 움직이는 바가 달랐던 내적 고통의 시기를 지나 결국은 두 자아가 일치하면서 자유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를 지우는 화학자>의 주인공 폴 폴콘은 자폐적인 인생의 비참함을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어린아이들의 얼굴을 지우는 의식을 통해 보상받고자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한 소년과의 뜻하지 않은 동거를 통해 따뜻한 영혼으로 거듭난다. 이 경우에는 실제로 움직이는 바가 지향하는 바의 것으로 전환됨을 의미하며 비상식적 자아가 상식적 세계의 일원이 됨을 의미한다.
두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이 무릎꿇고 마는 현실, 즉 지향하는 바가 실제적인 것에 항복하고 마는 현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각각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희극적인 죽음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상식적 세계와 불화하는 존재는 존재의 자리를 잃어야 마땅하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내 친구 얘기로 돌아가보자. 이 녀석의 경우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여성'이 세상과의 화해를 위한 매개자이다. 여성은 자궁을 가진 존재로 완전성을 지닌 인간의 모델이다. 어린 시절이 상식과 비상식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면 여성은 결여와 완전성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어쨌거나 《새 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을 읽으면서 나는 그 친구를 떠올렸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유년기와 여성성은 언제나 개인의 삶을 세상과 화해시키는 절대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만 없어도 우리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비상식과 결여의 망령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