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한 작품.

투르니에는 '항해일지'라는 로빈슨의 섬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이야기로써 소설 안에 내포된 철학에 대해 설명한다. 물론 후반부의 '태양의 섬'에 이르면 그 자체로 이야기화 되지만, 철학자이고자 했던 작자의 목소리가 가장 선명히 들어 있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마 상투적인 얘기로서의 타자성 '나는 너다'라는 말을 잊어버린다면 이 소설을 독해해 내기가 쉬울 것인데, 왜냐하면 아마 타자란 일종의 감추어진 세계관이기에 명확히 무엇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맑시즘 같은 사회 사상 마저 이데올로기 로서 타자가 되는 것이니까.

투르니에 자신이 직접 말하는 타자란 베르그송이 말하는 일종의 직관에 대한 해설을 그대로 보는 듯 하다. 로빈슨이 섬을 영국식으로 식민지 하기 위해 가축을 기르고 성을 축조하며 헌법을 만드는 등의 일련의 질서 지우기는 주체에 의한 인식에 해당된다. 하지만 우연히 섬 안에서 시간을 지배하던 물시계가 멈추어 버림으로써 과학과 기술, 노동과 사회적 야망을 상징하는 세계는 문을 닫아버린다.

'어두운 방안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촛불 하나가 어떤 물체는 밝게 비추고 다른 물체들은 어둠 속에 남겨둔다. 그것들은 잠시동안 빛을 받아서 어둠 속에서 솟아났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녹아든다.

그런데 그들이 빛을 받아 밝아 지건 않건 간에 그들의 본질이나 존재는 변함이 없다. 그것들은 빛살이 그들 위에 던져지기 이전에도 그러했고 빛이 비쳐지는 동안이나 그후에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로빈슨의 주체로서 상징되는 '촛불'의 불빛이 사라진 후에도 소박하게 존재하던 사물들의 움직임은 계속 될 것이다. 스페란자(무인도 이름, 희망이라는 뜻)에 있는 모든 식물들과 모래, 태양들은 대상의 위치에서 벗어나 각각 그에 해당하는 주체를 가진다. 결국 세계는 송두리째 '나의 영혼 속에 흡수되고' 마는 것이다.

그 후, 스페란자는 더 이상 사물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여인으로서 그 내밀함을 드러낸다. 로빈슨은 장미빛 골짜기의 나무와 섹스를 하기도 하고 그 후 섬은 새로운 식물들을 그 사랑의 결과로 잉태하기도 한다. 로빈슨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책인 성경의 '아가서'는 그 결합을 축복해주는 또다른 타자이다.

'이정도의 깊이에서는 스페란자의 여성적 본질에는 모성(母性)의 모든 속성이 깃들여 있었다.'(p127)

'나를 그대 가슴위에 도장처럼 찍으시라. 그대 팔 위에 도장처럼 찍으시라.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이기에!'(p162)

그곳에 사는 인디언들인 아로캉족의 희생제물이 될 뻔하다가 로빈슨의 실수로 목숨을 구하여 그의 노예가 된 방드르디(영어로 프라이데이, 금요일)는 로빈슨이 인식하지 못한 모든 신비를 가진 자연의 화신이 된다.

투르니에 자신은 수많은 상징과 신화들을 소설책에다 써먹는다. 한가지 예를 들면,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 코울리지의 '노수부의 노래'에 나오는 새인 알바트로스와 거기에 나오는 죽음과 재생의 모티브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이젠 알바트로스가 그전의 독수리보다 낫고 푸른색이 붉은 색보다는 낫지'

방드르디 와의 교감 속에 직관과 본질적 인식에 익숙해진 로빈슨에게 더 이상 독수리로 대표되는 물질적 시선이 아니라 관조적이고 새로운 인간이 된 로빈슨에게 '시인'들의 새인 알바트로스가 더욱 적합한 것이다.

어려운 듯 하지만 그 안에 인간 정신이 승화되는 모습을 담고 있고 서술되는 상징들의 상호관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삶에 '초상'을 부여한다.

정말 미셸 투르니에의 소설들을 다 읽기 위해 불어를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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