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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셜록 홈즈 시리즈01 : 주홍색 연구 셜록 홈즈 시리즈 1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5월
평점 :
판매중지


셜록 홈즈 1 : 주홍색 연구 (1887)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추리 문학의 고전.

 

왓슨 박사와 명탐정 셜록 홈즈의 운명적 만남!

 

셜록 홈즈 1 : 주홍색 연구, 표지 中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셜록 홈즈'라는 이름을 분명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물론, 일본의 만화가 아오야마 고쇼의 인기 만화 작품인 '명탐정 코난'를 통하여 '셜록 홈즈'가 더욱 친밀하게 느껴질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 예상된다. 만화 '명탐정 코난'에 자주 거론되는 '셜록 홈즈'는 분명 많은 어린이, 청소년, 나아가서는 성인들에게 까지도 '셜록 홈즈'에 더 많은 기대감을 부여하고 '한 번 읽어보고 싶다', 라는 충동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한 번 읽어보고 싶다'라는 말에 정확하게 일맥상통한다. 거의 대부분의 또래와 마찬가지로 '명탐정 코난'이라는 만화책을 읽으면서 자라온 나에게, 사실 추리물이라고 한다면 '셜록 홈즈', '심농', '미스 마플' 등의 명탐정들 보다 '명탐정 코난'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도리이다. 따라서 처음 '셜록 홈즈'를 접할 때, 사실상 '명탐정 코난' 속에 등장하는 수 많은 '셜록 홈즈'와 '아서 코난 도일'을 증명받길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상상했던 홈즈, 내가 기대하는 코난 도일의 집필력, 그 모두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 첫 번째인 '주홍색 연구'는 명탐정 셜록 홈즈와 그의 유능한 조수인 왓슨 박사가 처음 만나게 되는 순간을 서술하며 시작된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그 첫장을 때는 것이다. 대다수의 고전 추리물이 종종 기승전결을 무시한채 무엇인가 투박한 느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인데, 셜록 홈즈 시리즈는 그러한 느낌을 많이 받지는 못했다. 물론, 초역이 아닌 많은 번역을 통하여 완벽에 가까운 번역물이 나온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처음부터 엉망이었다고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기대했던 '셜록 홈즈'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 누가 셜록 홈즈를 읽기 전에, 그를 괴짜에다 문학과 철학등에는 일반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셜록 홈즈는 그 예상을 뒤엎고 그다지 완벽한 모습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추리에 있어서 그는 신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진 명탐정으로 묘사되지만 그외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어보인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셜록 홈즈를 상상할 때, 가장 오류를 범하는 부분일 것이다.

 

 고전 추리물은 현대의 추리물과 조금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물론, 과학 및 문명의 발전을 통하여 달라진 환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추리에도 유행이 있는 것인지, 현대의 추리물은 추리물 속에 등장하는 속임수와 사건 해결 능력에 초점이 잡혀있다면, 고전의 추리물은 사건이 발생하게 된 구체적인 원인이 중심이며, 사건 해결은 부가적인 산물로 치중된다. 그러나 '셜록 홈즈'는 현대 추리물과 같은 속임수에 대한 사건 해결이 상당히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다. 물론, 고전물의 특징인 사건의 원인 또한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것이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많은 독자들이 '셜록 홈즈'라는 작품에 많은 사랑을 주는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에 충실하지만 그저 기본 뿐만이 아닌, 추리소설계의 성경과도 같은 기본서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 싶다.

 

 '명탐정 코난'에서의 주인공 코난의 이름이 '아서 코난 도일'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을 '명탐정 코난'을 보거나, 읽은 사람이라면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명탐정 코난' 속에는 '아서 코난 도일'과 연관된 많은 것들이 등장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와 유사한 사건이 진행되는 경우도 발생하며, 작품 속 지명과 사건 등이 인용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분명 '셜록 홈즈'가 그 존재만으로 추리물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바라고 이해하고 싶다. 몇 백년이 지났지만 결코 촌스럽지 않다. 매우 세력적이고 현대적이다. 물론, 마차를 타고 다니며, 파이프를 이용하여 담배를 피우는 모습등의 현대 사회와 근소한 차이점은 존재하지만 '셜록 홈즈'가 남기는 감동과 재미는 현대인이 느끼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주홍색 연구'로 시작되는 '셜록 홈즈 시리즈'의 출발이 좋다. 매우 매력적인 등장인물들로 장식된 이 추리소설을 읽지 않는다면 분명 후회할 것임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다. 따라서 조금은 더 그의 추리 속에 빠져들 필요성이 있다.

 

56번째 만남

2012. 07. 03 ~ 2012. 07.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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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인간
알렉산드르 벨랴예프 지음, 김준수 옮김 / 마마미소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다는 것을 명시하는 바입니다.

 

물고기 인간 (1928)

 

물속에서 살 수 있는 인간에 대한 공상과학소설로서

생체실험, 기관이식수술, 인간의 생물학적 개량을 테마로 한

알렌산드르 벨라예프의 대표작!

 

물고기 인간, 표지 中

 

 SF작품을 읽는 대다수의 독자들은 SF작품의 존재 이유가 '재미'또는 '상상력'에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분명 '환상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SF소설'은 분명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관심으로 재미를 이끌어내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벨랴예프의 1928년 작품 '물고기 인간'은 SF소설의 주된 목적인 흥미를 우선시하는 것이 아닌, 인간 개조에 따른 윤리의식과 종교관, 인간의 삶 속에서의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었기에 상당히 의미있다고 볼 수 있다.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인어공주'를 지금 이렇게 거론하는 이유는 알렉산드르 벨랴예프의 '물고기 인간'과 상당히 비슷한 상황에 놓인 두 등장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물고기 인간'의 주인공은 '인어공주'의 주인공처럼 태생부터 반인반수의 어인은 아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반인반수의 어인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을 가지며 자신의 신체적 한계로 인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다가가지 못한다. (두 작품 모두, 자신이 사랑하게 된 사람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공통점도 존재한다) SF작품이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를 따르자면 '물고기 인간'은 철저하게 로맨스물을 지향한다. 주인공, 이흐티안드르가 구티에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많은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비슷한 구조를 띠고 있는 두 작품은 결과적으로 동화와 SF소설이라는 분야에 따라 결론 부분에 다다랐을 때, 다른 결말을 제공한다. '인어공주'는 동화적 환상과 주인공의 애절한 사랑을 부각하기 위하여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지만 SF소설인 '물고기 인간'은 결론 부분에 생체실험과 기관이식수술 등의 과학적 용어로 장식하며 마무리 되어간다. 그러나 SF소설을 과장한 로맨스물적 요소가 흥건하기 때문에 '인어공주'처럼 눈물나게 애절하고, 슬픈 결말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다.

 

 작품 '물고기 인간'의 주된 요소는 분명 로맨스물이라고 표현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작가가 충분히 작품 속에 투영시킨 사실이며 직접적으로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충격을 받은 부분은 '불행은 인간이 짐승의 자손이라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사람의 탈을 쓰고도 여전히 짐승같은 행위, 거칠고 사악하고 어리석은 짓을 멈추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라는 책 시작 부분의 머릿말이다. 알렉산드르 벨랴예프의 이런 가치관은 작품의 후반, 살바토르의 재판 진행에서 살바토르의 진술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바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살바토르의 생체실험과 기관이식수술을 반인류적인 기독교적 관행을 위반하는 상당히 난폭하고 위험한 행동이라고 표현했다. 분명 그들의 말도 상당히 수긍이 가는 바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독자의 보다 신중하고 깊은 사고가 요구된다. 인간의 불행은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 그 불행의 시작점은 과연 인간이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것인가. 인류의 오만한 판단과 이기적인 사고로 지금의 불행을 야기시킨 것은 아닐까. 수 많은 질문이 끊임없이 오간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류의 윤리 의식에 기본적으로 내재된 사상일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 인간'은 이러한 사상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논쟁을 이어간다. 한 명의 인간을 강제로 변화시켜 물 속에서 살게 만들어버린 살바토르는 유죄인가, 아니면 그렇게라도 수술을 해서 한 생명을 살려낸 살바토르가 무죄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인간을 이렇게 나약하게 만드신 조물주 큰 착오인가. '물고기 인간' 속에는 상당히 다양한 사상과 다양한 과학적 진술(물론, 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하여 과장된 것도 존재한다)로 각자 서로의 주장을 강력하게 표명하고 자신을 변호한다. 그렇지만 사실상 누군가의 무죄, 유죄를 결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인류의 생존 욕구는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망이며, 종교적 입장에서는 그러한 욕망은 불필요한 사회 악일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을 통하여 인류는 의학을 발전시켜 인간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었지만 그러한 이유로 수 없이 많은 희생자를 야기시켜 윤리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방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러시아 SF소설로 유명한 '물고기 인간'을 단순한 SF소설로 정의내리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로맨스소설이라고 표현하고 싶다는 것도 아니다. 물론 SF소설로서의 과학적 지식과 흥미, 로맨스소설로서의 애절함과 슬픔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하여 이 부분에서 느끼는 재미보다 더 많은 것을 분명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류는 사고하기에 발전한다. 이 작품은 분명 개인을 즐겁게 해줄 수 있을 만큼 쉽게 쓰여져 결코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재미 뒤에 있을 하나의 사상을 깊게 고민할 때, 독자는 한 층 발전하고 문학은 그 영생을 한 번 더 증명받는 계기가 될 것이다.

 

55번째 만남

2012. 06. 26 ~ 2012. 07.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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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몰락하는 자 (1983)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와의 만남으로

서서히 파멸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

이상적 예술 앞에 몰락하는 자를 위한 진혼곡

 

바흐만, 한트케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죽음과 절망의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표지 中

 

 이상향에 대한 인간의 갈망, 욕구, 좌절에 따른 시련. 인간이 기본적으로 느끼는 한계점에서 다가오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왜곡하며 인간의 내면 속 나약함을 직시하게 만드는 작품,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1983년 작품 '몰락하는 자'이다.

 

 작품은,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를 거부당하고 점차 파멸해가는 베르트하이머의 행로를 서술하며 진행된다. 이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한 이 부분은 독자로 하여금 서술자인 '나'의 감정에 동화되게 만들고 글렌 굴드와 베르트하이머를 끊임 없이 비교하게 만든다. 또한 이 부분에서도 '몰락하는 자'의 서술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사실, 고전 작품은 누구에게나 매끄럽게 읽히지는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이 작품은 그러하다. 작가인 토마스 베른하르트만의 특징이 독자들에게 '몰락하는 자'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것을 강력하게 저지한다. 화자인 '나'를 이용하여 독자들의 개인적인 생각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베르트하이머에 대한 '나'의 생각이 마치 독자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기 위한 '나'의 '생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물론, '몰락하는 자'는 서술 방식에서만 그 특이함을 지닌 것은 아니다. 작품에서 서술하는 장소와 시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사실상 가장 주된 내용의 배경은 '나'가 생각하는 현재가 아닌 과거이다. 그러나 '나'는 현재의 짧은 순간에 과거를 상기시켰으며, 한 권의 책 분량이 나올 정도로 글렌 굴드와 베르트하이머를 생각을 해낸 것이다. 그 속에 글렌 굴드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베르트하이머는 점차 몰락해갔다. 많은 독자들도 처음에는 이 부분에서 혼란을 겪고 작가의 각종 방해로 인하여(혹은 자신의 글읽기 능력에 따라) 짧은 분량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상당히 사색하게 만드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인간의 욕망, 인간의 내면 속에 기본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이상향에 대한 갈망과 실현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좌절. 베르트하이머는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인하여 파멸되어갔다. 화자인 '나' 또한 베르트하이머와 마찬가지로 글렌 굴드에 의하여 좌절감을 맛보았지만 결국에 베르트하이머는 파멸하였으며 자살로 이상적인 죽음에 조금이라도 더 근접하길 소망했다. 그러나, 누가 마지막의 승자일까. 그것은 조금 고민해 볼 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천재 피아니스트 였지만 가장 먼저 자연사한 글렌 굴드, 가장 유복한 가정에서 행복할 수 있었던 조건이 갖추어 졌지만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베르트하이머, 그리고 결국에는 마지막으로 살아 남은 '나'. 그들의 이상향에 도달한 글렌 굴드가 승자일까, 결국에는 혼자 살아남아 그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뜻대로 남길 수 있는 '나'가 승자일까. 또는, 스스로 가장 이상적인 죽음을 택한 베르트하이머가 승자일까. 가장 괴기하고도 모순적인 그들의 삶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관의 여주인과 베르트하이머의 사냥 별장의 관리인인 프란츠를 통하여 개인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그들은 '몰락하는 자', 자신을 항상 불행하다고 말하는 베르트하이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항상 불투명한 미래에 공포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들의 공포심은 자신의 생명을 연명시켜 줄 '부'라는 존재의 부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의 공포심은 바로 '재물'이 없기에 파생된 하나의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베르트하이머는 그의 생명을 충분히 보장해 줄 '부'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공포심은 '재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이상향'이 없기에 파생된 또 다른 두려움이었다. 여관의 여주인과 별장의 관리인인 프란츠가 베르트하이머와 같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행복했을까. 베르트하이머가 여관의 여주인과 별장의 관리인인 프란츠와 같은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면 이상향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며 자신을 스스로 파멸시키는 '몰락하는 자'가 되었을까. 가치의 차이는 때론 그것을 가지지 못한 타인에게 비난을 받게 만들고, 자신을 점차 불행하게 만들며, 각각의 다양한 몰락으로 점차 인간의 마음을 잠식시킨다.

 

 작품 '몰락하는 자'를 권유하기에는 이 작품의 내용은 슬프다. 특히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작품이 건내는 하나의 주제가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항상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으며 자격지심, 우월의식에 도취한 현대인들에게 이 작품의 주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54번째 만남

2012. 06. 03 ~ 2012. 0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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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서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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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서간 (2010)

 

300만 독자를 매료시킨 베스트셀러 작가 미나토 가나에!

인간 심연의 독을 정면에서 묘파하는 차가운 매력,

'고백', '야행관람차'에 이은 또 하나의 중독적 서스펜스.

 

왕복서간, 표지 中

 

 다 각도적 시선에서 독백 및 고백의 형식을 취하는 전개로 유명한 미나토 가나에의 국내 신간 '왕복서간'이다. '왕복서간'은 편지의 형식을 취하며 표정 및 대화가 아닌, 편지 속의 단어들로 상대에게 자신의 의견 및 생각을 전달하는 세 개의 중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이 매력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편지의 형태, 글에만 의존하는 말하기, 그 속에 숨어있는 그림자와 오류는 독자를 상당히 서늘하게 하며 때로는 공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세 편의 이야기가 묶여있는 '왕복서간'은 각각 행방불명된 친구의 행방을 찾는 '십 년 뒤의 졸업문집', 남편과 제자의 목숨 중에서 갈등하는 '이십 년 뒤의 숙제', 십오 년 전의 사건의 의심으로 시작되는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이 있다. 세 편 모두 편지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독자들로 하여금 읽는데 지루하거나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아서 상당히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로 내용이 편하거나 유쾌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다. 일본 서스펜스물의 대표 작가인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이기에 기대를 하고 본 것도 존재하지만 기대한 것 이상으로, 상당히 매력있었던 그녀만의 색이 존재했던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녀의 대표적 작품 '고백'은 독백과 시점 전환에 따른 각 인물들의 진술로 냉소적인 분위기를 발생시켰으며 '야행관람차' 또한 그녀의 서스펜스적 심오함을 흠뻑 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왕복서간'과 비슷한 냉소적인 소름은 그녀의 작품 '속죄'에서 보여주었던 서스펜스적인 요소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작품, '왕복서간'은 결코 내가 본 진실이 진실이 아니다, 라는 심오한 의견을 독자에게 제시하며 사건에 연루된 많은 인물들의 다각도적인 시선에서 결코 하나의 사건이 하나의 의견으로 진술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했다. 이러한 부분이 '속죄'에서도 존재했다. '속죄'에서도 또한 하나의 사건을 겪은 네 명의 학생이 서로 다른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로 어른이 되었으며 어른이 된 후 자신들이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의 생각을 진술한다. 그 때의 오류, 같은 사건을 겪은 네 명의 아이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성장했다, 라는 소름은 독자들에게 미나토 가나에만의 서스펜스를 소개하기에 충분했다.

 

 작품 '왕복서간'은 이러하다. 하나의 사건으로 파생되는 다양한 인물들의 의견이다. 이 뿐만 아니라 편지의 형태에서만 이루어지는 함정에서 오는 서스펜스는 독자들에게 이 작품이 결코 과거의 진실만을 들추어내는 행동에서 끝나게 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독자들은 더욱 철저하게 작가의 장난에 휘말렸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실마리와 직접적인 언급을 통하여 독자들은 처음부터 의심을 하면서 작품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이부분이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며 독자들이 다른 부분의 장난에 걸려들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물론 나 혼자만 걸려든 장난일 수도 있지만 분명히 다른 독자들 또한 나와 같은 상황에 놓여 허둥되고 소름돋게 될 것이다.

 

 철저히 미나토 가나에의 색을 먹은 그녀만의 작품이다. 다른 작품들 처럼 그녀만의 서스펜스를 구성했으며 또 한 번 독자들을 놀라게 하고 그녀의 글 솜씨에 다시 한 번 박수를 치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하나의 장편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녀의 작품을 세 편이나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다시 한 번 '왕복서간'은 매우 매력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편지 형태의 작품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이유도 존재하지만 단순하게 그녀의 작품이기에 매력을 느낀다는 것도 감출 수 없는 현실이다. 대다수의 독자들이 작가 미나토 가나에를 생각하면서 그녀의 작품 '고백'과 '속죄'를 많이 연관할 것이고 기대할 것이다. 물론 '왕복서간' 또한 그녀의 작품이기에 위에서도 한 번 말했던 것 처럼 그녀만의 서스펜스가 묻어있고, '속죄'와 비슷한 전개 및 느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속죄'를 기대하지는 말길 바란다. 중 단편의 구조상 큰 서스펜스를 묶기에는 서론과 본론의 분량이 너무나 부족하다. '고백'과 '속죄'를 기대하고 '왕복서간'을 접한 많은 독자들이 혹시나 실망하여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에 혹평을 할까 조심스럽게 남겨본다. 이번 '왕복서간'은 미나토 가나에가 단편으로도 이렇게 서스펜스적일 수 있구나, 논리적으로 독자들에게 공포심을 주입했구나 하며 재미있게 읽어주길 바란다. 

 

53번째 만남

2012. 06. 14 ~ 2012.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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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이동 - 살림하는 아빠, 돈 버는 엄마, 변화하는 가족
제러미 스미스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다는 것을 명시하는 바입니다.

 

아빠의 이동 (2012)

 

지구에서 가장 섹시한 종족의 이름 아버지

 

아빠의 이동, 표지 中

 

 사회 속의 아버지, 그것도 현대 사회 속의 아버지의 모습은 과거 역사 속에서의 아버지 모습과는 단연 그 기준을 달리한다. 이것은 비단 한 지역에만 국한되는 사실이 아닌, 지구촌 곳곳에서의 모습이며 아버지의 위치 변화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생성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위치가 변화했다는 것은 그들의 권위가 추락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위치를 과거와는 다르게 그 위치를 변화시켜 가정을 지킬 뿐이다.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그들의 모습은 수백,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분명 달라지지 않았다.

 

 인문학, '아빠의 이동'은 21세기에 들어서 변화하는 가족의 구조 형태를 서술한다. 그 중에서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위치 변화를 서술하는 것에 초첨을 두고 있는데, 제러미 스미스는 '주부 아빠'에 대한 자신의 의견과 여러 인용글 및 인터뷰 등을 첨부하여 '주부 아빠'를 설명한다. 상당히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주부 아빠'의 증가는 사회의 발전에서 비롯된 여성의 사회 진출과 합리적으로 가정을 꾸리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에서 파생된 하나의 대안이라고 제시한다. 사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분명 과거에도 존재하였지만 21세기에서의 모습과는 그 수치를 달리한다. 또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증가함에 따라, 그녀들의 급여는 남성의 급여와 거의 대등해졌으며, 일부는 남성의 급여를 이미 초월하였다. 이것이 가정을 합리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의 조건이다. 그렇다. 분명 과거와는 다르게,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많이 벌던 시대는 거의 종결했다고 볼 수 있다.(물론, 아직 대한민국의 급여 상황과 가족 구도는 제러미 스미스가 주장하는 아버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따라서, 가족의 구조를 변화시켜야할 이유가 존재한 것이다. 꼭 가족을 더 윤택하게 이끌고 갈 수 있는 어머니의 재력과 아이를 올바르게 키울 수 있는 아버지의 교육열이 존재하는데 그 위치를 고정하여 구태여 가족의 미래를 뒤흔들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해본다.

 

 제러미 스미스의 주장과 그가 인터뷰한 많은 '주부 아빠'의 말들은 상당히 재밌다. 재밌다, 라는 표현이 그들의 주장과 위치를 우습게 본다는 것이 아님을 먼저 표명하고 싶다. 그들의 새로운 위치와 상황은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대안을 제시한다. 새로운 것을 보면 호기심과 재미를 느끼는 대다수의 사람처럼, 분명 독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황은 상당히 재미있는 상황이다. 세상이 변화한다는 사실은 많은 남성과 여성, 아버지와 아머니의 위치를 변화시키며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한 많은 환경을 제시한다.

 

 분명, '주부 아빠'는 상당히 늘었다. 그러나, 아직 대한민국을 비롯한 일본, 미국, 유럽 국가들의 상황은 제러미 스미스가 주장하는 '주부 아빠'의 위치를 인정하는 추세는 아니다. 분명 그도 말했듯이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의 위치를 주눅들게 만들며 자신을 '주부 아빠'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우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인류의 고정관념이다. 분명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순수한 가정의 모습인데, 과거의 모습이 단지 그렇지 못햇다는 이유로, 우리는 아버지를 끝없이 사회로 내몰고, 아머니를 집안에 예속시켜버린다. 법으로 고정하거나 윤리적으로 못을 박은 것이 아닌 상황인데 인류는 그런 고정관념을 끝없이 반복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지금은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매우 확고하다. 그러나 시대는 변화하고 미래상은 바뀌었다. 그 누구도 미래는 장담하지 못한다. 제러미 스미스의 '주부 아빠'의 전성기가 언젠가는 도래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집에 있는 아버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조차도 의아함을 느낀다. 여전히 사회의 구조는, 특히 대한민국의 사회 구조는 이 틀에서 벗어나기 상당히 힘들 것이다. 어머니 중심의 가정을 상상하기에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항상 아버지의 위주였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하나의 작품을 감상할 때에도 언제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하여 음식을 장만하시고, 집안 청소를 하시는 등의 모습으로 비유되고 아버지는 일을 하시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보는 대중들은 그러한 모습이 마치, 그들에게 할당된 임무인 것 마냥 그런 역할에 동조되며 자신들의 일이라 착각에 빠져 그 속에 녹아든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이런 글이 떠오른다. "어린 아이에게, 여자아이는 이래야한다. 남자아이는 이래야한다, 라고 성역할 분담과 정의를 내려주면 안된다."라는 말, 말이다. 이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 대상이 어린 아이, 어른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사회는 끝없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그들의 역할을 강요했다, 라는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과 틀에 박힌 사고는 우리들로 하여금 사고의 전환을 하지 못하게 하는 큰 장애물이 되며 결국에는 고착화되게 만드는 큰 오류의 연못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상당히 좋은 작품이었다. 분명 알고는 있지만 누군가는 정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한 조심스러운 사고 전환은 현대인이 지녀야 할 폭넓은 사고와 이해를 지닐 수 있도록 유도했다. 아버지가 아이의 육아를 담당하는 '황제 펭귄'의 모습을 책 표지로 사용한 만큼 작품 속 아버지의 모습 또한 '황제 펭귄 수컷'과 다르지 않다.

 

 이 작품을 보면서 생각났던 소설이 있었다. 김이설 작가의 2011년 작품 '환영'이었는데, 작품 속에도 '주부 아빠'와 비슷한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제러미 스미스가 주장한 '주부 아빠'는 무능력한 사람과는 그 의미를 달리한다는 것이며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가 사회적 책임을 마땅히 지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나 '환영' 속의 아버지는 단순하게 고시 공부에 지쳐 주부일을 하게 된 것이며 아내는 자신은 아이를 돌보고 남편은 일을 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에서 그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 제러미 스미스가 주장한 '주부 아빠'의 이상적인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환영' 속의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다. 언제나 불행했다. 행복한 가정, '주부 아빠'와 '일하는 엄마'의 모습은 그들이 서로 그런 위치에 설 수 있도록 쌍방 합의를 하며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위치를 그들만의 대화를 통하여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주부 아빠'와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지녔어도 '환영'속의 그들은 제러미 스미스의 가정과 그의 친구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부부만의 대화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는 변화한다.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언제나 가장 먼저 민감하게 변화하는 것은 가족의 형태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가족은 핵가족의 모습으로 분할되었으며 현재는 더욱 세밀한 형태로 분할되어가고 있다. '주부 아빠'는 사회가 양상한 불편한 진실이 아니다. 단지 인류가 자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대안이며 또 하나의 가족인 것이다. 그 누가 이러한 형태를 지적하지 못하며 그들을 이상적이지 못한 존재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은 아이를 사랑하며, 서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에 있다. 가족에게 있어서 그들의 위치가 어떠하든 가족 사랑이라는 가장 중요한 이상점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언제나 행복할 것이다.

 

52번째 만남

2012. 05. 21 ~ 2012. 06.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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