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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이동 - 살림하는 아빠, 돈 버는 엄마, 변화하는 가족
제러미 스미스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다는 것을 명시하는 바입니다.
책
아빠의 이동 (2012)
지구에서 가장 섹시한 종족의 이름 아버지
아빠의 이동, 표지 中
사회 속의 아버지, 그것도 현대 사회 속의 아버지의 모습은 과거 역사 속에서의 아버지 모습과는 단연 그 기준을 달리한다. 이것은 비단 한 지역에만 국한되는 사실이 아닌, 지구촌 곳곳에서의 모습이며 아버지의 위치 변화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생성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위치가 변화했다는 것은 그들의 권위가 추락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위치를 과거와는 다르게 그 위치를 변화시켜 가정을 지킬 뿐이다.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그들의 모습은 수백,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분명 달라지지 않았다.
인문학, '아빠의 이동'은 21세기에 들어서 변화하는 가족의 구조 형태를 서술한다. 그 중에서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위치 변화를 서술하는 것에 초첨을 두고 있는데, 제러미 스미스는 '주부 아빠'에 대한 자신의 의견과 여러 인용글 및 인터뷰 등을 첨부하여 '주부 아빠'를 설명한다. 상당히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주부 아빠'의 증가는 사회의 발전에서 비롯된 여성의 사회 진출과 합리적으로 가정을 꾸리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에서 파생된 하나의 대안이라고 제시한다. 사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분명 과거에도 존재하였지만 21세기에서의 모습과는 그 수치를 달리한다. 또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증가함에 따라, 그녀들의 급여는 남성의 급여와 거의 대등해졌으며, 일부는 남성의 급여를 이미 초월하였다. 이것이 가정을 합리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의 조건이다. 그렇다. 분명 과거와는 다르게,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많이 벌던 시대는 거의 종결했다고 볼 수 있다.(물론, 아직 대한민국의 급여 상황과 가족 구도는 제러미 스미스가 주장하는 아버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따라서, 가족의 구조를 변화시켜야할 이유가 존재한 것이다. 꼭 가족을 더 윤택하게 이끌고 갈 수 있는 어머니의 재력과 아이를 올바르게 키울 수 있는 아버지의 교육열이 존재하는데 그 위치를 고정하여 구태여 가족의 미래를 뒤흔들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해본다.
제러미 스미스의 주장과 그가 인터뷰한 많은 '주부 아빠'의 말들은 상당히 재밌다. 재밌다, 라는 표현이 그들의 주장과 위치를 우습게 본다는 것이 아님을 먼저 표명하고 싶다. 그들의 새로운 위치와 상황은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대안을 제시한다. 새로운 것을 보면 호기심과 재미를 느끼는 대다수의 사람처럼, 분명 독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황은 상당히 재미있는 상황이다. 세상이 변화한다는 사실은 많은 남성과 여성, 아버지와 아머니의 위치를 변화시키며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한 많은 환경을 제시한다.
분명, '주부 아빠'는 상당히 늘었다. 그러나, 아직 대한민국을 비롯한 일본, 미국, 유럽 국가들의 상황은 제러미 스미스가 주장하는 '주부 아빠'의 위치를 인정하는 추세는 아니다. 분명 그도 말했듯이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의 위치를 주눅들게 만들며 자신을 '주부 아빠'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우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인류의 고정관념이다. 분명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순수한 가정의 모습인데, 과거의 모습이 단지 그렇지 못햇다는 이유로, 우리는 아버지를 끝없이 사회로 내몰고, 아머니를 집안에 예속시켜버린다. 법으로 고정하거나 윤리적으로 못을 박은 것이 아닌 상황인데 인류는 그런 고정관념을 끝없이 반복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지금은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매우 확고하다. 그러나 시대는 변화하고 미래상은 바뀌었다. 그 누구도 미래는 장담하지 못한다. 제러미 스미스의 '주부 아빠'의 전성기가 언젠가는 도래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집에 있는 아버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조차도 의아함을 느낀다. 여전히 사회의 구조는, 특히 대한민국의 사회 구조는 이 틀에서 벗어나기 상당히 힘들 것이다. 어머니 중심의 가정을 상상하기에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항상 아버지의 위주였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하나의 작품을 감상할 때에도 언제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하여 음식을 장만하시고, 집안 청소를 하시는 등의 모습으로 비유되고 아버지는 일을 하시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보는 대중들은 그러한 모습이 마치, 그들에게 할당된 임무인 것 마냥 그런 역할에 동조되며 자신들의 일이라 착각에 빠져 그 속에 녹아든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이런 글이 떠오른다. "어린 아이에게, 여자아이는 이래야한다. 남자아이는 이래야한다, 라고 성역할 분담과 정의를 내려주면 안된다."라는 말, 말이다. 이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 대상이 어린 아이, 어른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사회는 끝없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그들의 역할을 강요했다, 라는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과 틀에 박힌 사고는 우리들로 하여금 사고의 전환을 하지 못하게 하는 큰 장애물이 되며 결국에는 고착화되게 만드는 큰 오류의 연못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상당히 좋은 작품이었다. 분명 알고는 있지만 누군가는 정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한 조심스러운 사고 전환은 현대인이 지녀야 할 폭넓은 사고와 이해를 지닐 수 있도록 유도했다. 아버지가 아이의 육아를 담당하는 '황제 펭귄'의 모습을 책 표지로 사용한 만큼 작품 속 아버지의 모습 또한 '황제 펭귄 수컷'과 다르지 않다.
이 작품을 보면서 생각났던 소설이 있었다. 김이설 작가의 2011년 작품 '환영'이었는데, 작품 속에도 '주부 아빠'와 비슷한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제러미 스미스가 주장한 '주부 아빠'는 무능력한 사람과는 그 의미를 달리한다는 것이며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가 사회적 책임을 마땅히 지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나 '환영' 속의 아버지는 단순하게 고시 공부에 지쳐 주부일을 하게 된 것이며 아내는 자신은 아이를 돌보고 남편은 일을 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에서 그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 제러미 스미스가 주장한 '주부 아빠'의 이상적인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환영' 속의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다. 언제나 불행했다. 행복한 가정, '주부 아빠'와 '일하는 엄마'의 모습은 그들이 서로 그런 위치에 설 수 있도록 쌍방 합의를 하며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위치를 그들만의 대화를 통하여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주부 아빠'와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지녔어도 '환영'속의 그들은 제러미 스미스의 가정과 그의 친구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부부만의 대화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는 변화한다.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언제나 가장 먼저 민감하게 변화하는 것은 가족의 형태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가족은 핵가족의 모습으로 분할되었으며 현재는 더욱 세밀한 형태로 분할되어가고 있다. '주부 아빠'는 사회가 양상한 불편한 진실이 아니다. 단지 인류가 자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대안이며 또 하나의 가족인 것이다. 그 누가 이러한 형태를 지적하지 못하며 그들을 이상적이지 못한 존재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은 아이를 사랑하며, 서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에 있다. 가족에게 있어서 그들의 위치가 어떠하든 가족 사랑이라는 가장 중요한 이상점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언제나 행복할 것이다.
52번째 만남
2012. 05. 21 ~ 2012. 06.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