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문학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 미술사 결정적 순간에서 창조의 비밀을 배우다
김태진 지음 / 카시오페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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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법은 고전 회화를 완성시킨 네 개의 퍼즐 중에서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다.
앞선 세 개의 퍼즐인 원근법, 해부학, 유화가 르네상스 시대를 있게 했다면 명암법은 그 뒤를 이은 바로크 시대를 있게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가들은 캔버스 뒤로 공간을 만들어 냈다.  원근법을 이용해서였다.  명암법은 이전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림은 이제 ‘보이는 모두를 과시하듯 나열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만 선택해 강조함으로써 ‘화가가 의도한 바를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주로 대상만 바라봤다면 바로크 예술가들은 관객들의 마음을 노렸다.     
김태진, <아트 인문학> 中

혁신이란 키워드로 읽는 책이다.  글자는 시각적 매력이 부족해 따분하고 지루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한 장 한 장 넘겨야하고 해석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하지만(오래못가 수면제가 된다^^;), 그림은 색채와 구도 덕분에 시야에 한 눈에 들어오는 단 한 장의 책이다. 영화는 100분 남짓 움직이는 그림으로 눈을 사로잡는 책이다.

그림이 주는 창조의 힘이 즉시성이라면 영화는 그 중간, 책은 제일 나중의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그림과 책이 만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런점에서 그림을 해설하는 책은 인간의 상상력과 혁신을 자극하는 좋은 교재다.  더욱이 그림의 역사를 '혁신'이란 관점에서 잘 쓰인 책은 반드시 서가에 꽂아 두어야 할 필독서의 자리를 차지할 만하.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책의 곳곳에 혁신이란 토끼가 숨어있어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림 해설은 덤.

예술은 곧 인간 사랑이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하니까.   -제프 쿤스(미국 미술가)

어디 예술 뿐이겠는가.  책이든 영화든 회사든 개인 관계든, 이 세상은 인간 사랑이란 기본 토대위에 모든 것을 올려야 한다.

https://huckle22.tistory.com/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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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 - 텍스트로 콘텍스트를 사는 사람들에게
박양규 지음 / 샘솟는기쁨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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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방식이 무엇을 성취하고 소유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성경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의 가치를 고민하게 된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욕망과 탐욕의 포로가 되었고, 노아는 그 가치관을 등지고 방주를 만들었다.  노아에게 선택의 기준은 ‘이익이 되는가’의 기준이 아니라 ‘옳은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것이 우리가 선택을 앞두고 붙들어야 가치가 아닐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자.  만일 우리 생애가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더 비싼 집, 비싼 자동차, 명품 옷을 소유하지 못했음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좀 더 사랑하지 못하고, 좀 더 남을 위해 살지 못했던 삶을 후회할 것이다.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지탱하는 진정한 가치다. 쉬지 않고 달려가는 삶을 잠깐 멈추고 진짜 소중한 것들 것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박양규, <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 中

자본주의 속에 살면서 우리들의 성경 읽기나 설교도 자본주의가 묻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윗의 물맷돌 부터 홍해의 갈라짐, 갈멜산의 흥미진진한(?) 대결 등 영웅을 중심으로 한 서사적 순종이란 스토리에, 99% 이상의 로또 낙첨자들처럼 꿈만을 꾸었던 적이 얼마나 많은가.  성경 속에는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고, 하나님께선 직접 나타나기도 대화하기도 예지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은 아무개 같은 우리들말이다.

성경을 펼치면 홍해 갈라지듯 찬란한 하나님의 역사가 시야에 들어오지만, 성경을 닫으면 퍽퍽한 삶의 현실이 누런 황야에 먼지 풀풀 날리며 언제나 목마른 아무개들처럼.  유튜브의 수많은 간증 역시 로또 당첨자들처럼 말하지만, 유튜브를 닫으면 다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답답한 일상의 아무개들처럼.

이 책은 일상의 아무개들의 관점에서 성경 읽기를 한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책이라서 공감이 간다.  로또 당첨자가 아닌, 매주 로또에 낙첨되어 일주일 꿈으로 사라지는 연기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아무개들도 성경의 곳곳에 숨겨져, 지금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있다는 것을.

단지, 아쉬운 점이라면...아무개의 시점에서 삶의 지침을 얻는 책이라고 하지만, 추천사를 쓴 이들의 면면은 아무개가 아닌 것이 '아주 아주' 걸리적거리지만 읽기를 권할 만한 책이다.  아무개를 위한 책이라면, 진짜 아무개들이 추천사를 써야 마땅하지 않을까.  추천사란 자고로 '이 책을 좀 읽어 주십사' 하는 마케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책팔기의 일부'이며, 자기 책을 돋보이게 화장하는 아무개가 아니될려는 특출한 것으로 보일려 하기에.  작가는 글로 승부해야지, 지금은 마케팅 책팔기로 보편화된 아무개 아닌 추천은 종이 낭비일 뿐이라 생각한다.  추천사 품앗이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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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라는 적 - 인생의 전환점에서 버려야 할 한 가지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이경식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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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는 분명 적이면서, 약이다.

에고는 조직생활에선 일정 정돈 필요하다.  마치 양날의 검처럼 긴장을 유지하는데 필요하지만, 지나칠 경우 자신을 해칠 수 있다.  


에고가 나쁜 방향으로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선 내려놓음이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서구 문화에선 자기를 적극적으로 드러내 놓는 경향이어서, 이 책은 동양의 내려놓음을 얘기하니 인기일 수도 있겠다.  동양은 기본적으로 겸양을 미덕으로 하는 문화라서 자칫 어울리지 않을 듯한 책이지만, 워낙 서구화된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잘나갈 때 까불지 말고, 늘 내려놓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책은 무수한 사례를 나열하지만, 결과는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주위의 인정을 받기 위해 흔들리지 말고, 증오와 분노를 내려놓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지극히 평범한 주장을 많은 사례를 인내심을 가지고 읽었다.


에고라는 흥미있는 주제를 다뤘길래 호기심으로 읽었는데, 역시나 단순하다.

에고를 버리고 증오와 분노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자기 인생을 근본적으로 밑바닥에 속박시킨다. 증오와 분노 대신 당신을 향한 모든 시선과 모든 말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모든 것들이 자양분이 되어 당신의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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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7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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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파우스트, 그동안 미루고 미루다 읽었다.  성경의 욥과 비슷한 경우라고 해서 펼쳤더니 첫부분만 비슷하지 전개되는 모습은 차이가 너무나 비교대상이라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파우스트는 법학, 의학, 신학까지 깊게 파고 들었지만 조금도 지혜로워 지지 않았다고 한탄한다.  결국 그는 학문을 알아갈수록 모르는 영역이 점점 커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의 지칠줄 모르는 욕망은 영혼까지도 악마에 팔 정도까지 다다른다.


그런점에서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는 관능에 깊이 취해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마음을 달래 보자고 유혹한다.  고통과 쾌감, 성공과 불만이 어지러이 교차하는 곳으로 사내 대장부는 쉬지 않고 활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악마의 유혹은 인간을 바쁘게 만들면서 그게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18~19세기나 지금 현재나 바쁜것은 여전하다.


18~19세기는 전기가 없어 낮의 길이가 짧았지만, 현대는 24시간 잠들지 않는 사회다.  어디 그뿐이랴 스마트폰 없는 현대인은 불안 증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야말로 악마가 점점 활동하기 편안한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24시간 편의점이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곳이며, 시급은 최저생활도 하기 곤란한 수준이다.  


사람은 가끔 고독할 필요가 있다.  기도이든 명상이든 사색의 시간을 통해 자기안의 자기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속도전인 현대에서 방향을 탐색하는 건 혼자만의 사색을 통해 자신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파우스트는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좇는다(성경의 욥과는 너무 달라 비교하지 않겠다).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간접 살인하고, 주술에 빠지는 등 욕망을 따라 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마지막에 선한 본성을 발견하는 순간 악마와의 계약을 이행해야 할 위기에 처하지만, 천사에 의해 구원받는다.  다소 뜬금없는 결말이다.  충실히 인간 욕망의 노예로 살다가 최종적으로 선한 본성을 회복한다는 건 통속적이면서도 기득권층에 면죄부를 부여한 듯한 찜찜한 기분이다.


인간은 어떤 쾌감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변화무쌍한 형상들을 뒤쫓다가 결국은 선한 본성으로 돌아오며 파우스튼 결말을 맺는다.  파우스트는 행복은 욕망을 따라 바쁘게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이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는다.


정작 현실에선 인간의 방황은 선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으로 결말이 많이 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더욱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바쁘게 일하며 사는 것일까?  파우스트의 방황이 그의 삶이 아니라 내 삶이라고 대입해보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추한 결말을 볼 수 있다.  파우스트 처럼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 것이냐, 한 번쯤 걸음을 멈추고 신이든 자신의 내면이든 조용한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사회에서 바쁘게만 살다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지 말고, 때론 홀로 신이든 자신의 내면이든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잡는 시간이 필요하다.  당일 배송, 즉각적인 응답 서비스는 우리 이웃이 그만큼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그 이웃이 처지만 바뀌면 내가 될수도 있다.  갑이면서도 누군가의 을이 되는 우리가 빠름빠름 경쟁보단 한 발 물러서는 방법도 필요할 듯 하다.

법학과 의학,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기울여 깊이 파고 들었거늘 이 가련한 바보가 조금도 더 지혜로워지지 않았다니! 결국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는 사실만을 깨닫다니

사유의 끈은 끊어졌고, 지식이라면 신물 난 지 이미 오래일세. 우리 한번 관능에 깊이 취해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마음을 달래 보세! 고통과 쾌감, 성공과 불만이 어지러이 교차하는 곳으로 사나이 대장부는 쉬지 않고 활동하는 법일세

어떤 쾌감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어떤 행복에도 흡족하지 못하고서 항상 변화무쌍한 형상들을 뒤쫓아 다니더니. 가련하게도 시시하고 공허한 최후의 순간을 붙잡으려 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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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죽었는가 - 신화가 아닌 역사
빌 오라일리 외 지음, 이광일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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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중 4명은 어부였다.  그 외 제자는 세리 등 사회 지배층이 아니었다.  예수는 소외받는 약자와 여자를 통해 활동했다.  기층 세력에겐 도전적 질문과 지혜로 그들을 당황하게 했고, 적으로 만들었다.  예수는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정기적 교제를 위해 따로 떨어져 기도했다.  그의 힘과 세상을 보는 통찰력은 어디에서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흩어져 있는(?) 4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를 읽으면 혼돈이 있을 수 밖에 없는(?) 부분을 역사로 소설처럼 풀어썼다.  4복음서가 나무의 횡단면이라면, 이 역사소설은 종단면이다.  로마의 역사를 얘기하면서, 그 당시 속국 이었던 유대땅과의 연관성을 알 수 있다.  대제사장 가야바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와의 관계, 그리고 그 가운데 유대민족이지만 로마의 편에 있는 참주(이 부분은 일제 시대 친일파와 기독교, 동양척식회사를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헤롯의 자손이 부귀영화를 누린 것처럼 이땅의 친일파도 현재 사회 지도층으로 군림하면서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나사렛 예수는 친구이자 제자였던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했다.  예수는 새벽에 체포되어 유월절 전날 사형이 집행되어야 하기에 일차천리로 유월절 새벽에 체포되어 대제사장 앞에 섰다.  사위를 둘러봐도 예수의 지지자는 없는 고독한 상황, 어린양 예수로.


군인과 성전 관리인들에게 매맞고, 침뱉힘을 당한다.  익히 아는 얘기다.  채찍질에 살집이 뜯겨나간다(이 부분은 성경에서 자세히 얘기하진 않는다. 핵심이 아니어서?).  극심한 고통과 창피함, 모욕이 함께 엄습한다.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게도 예수는 권력 앞에 발가벗겨졌다.


예수의 통옷은 귀한 거라(일반적 통옷은 내부 이음새가 거칠었지만 예수의 통옷은 그렇지 않았다) 간수들은 제비뽑기를 한다(귀한 것이니깐 서로 가질려고 했던 것이다).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짓 씌운다.  가시가 머리에 박혀 피가 흐르고, 욱신 거린다.  두 눈을 가리고, 선지자 노릇 하라며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는다.


그의 편은 현실에선 없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만이 그의 편이었다.

고독의 위로는 하나님이었다.


사형 집행인(죽일려고 달려드는 집행인)에게 죽기 직전까지 채찍질 당했다.  예수가 못 박힐 십자가의 가로 나무를 어깨에 짊어지고 해골 언덕으로 올라간다.  힘이 없자 유월절에 참석할 순례자에게 나무를 옮기게 한다.


골고다 언덕.  예수는 가로 나무에 뉘여진다.  사각 쇠못이 손목뼈 사이를 꿰뚫을 때의 고통, 다시 두 발을 포개고 못이 두 발을 뚫고 들어온다.  건장한 청년이 벌거숭이로 2미터 넘는 십자가에서 못 세 개로 고통을 오롯이 견딘다.  유월절 시작 이전에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한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보통 십자가에 걸터 앉을 수 있는 부분까지 없앴다.  신속하게 예수를 죽이고, 거룩한(?) 유월절을 성스럽게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절차도 없이 오직 유월절을 깨끗하게 보내기 위해 속전속결 불법과 억지로 유월절 어린양 예수를 죽여버린다.  얼른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이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순례자들이 가져온 양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환전상으로부터 수수료를 챙겨야 한다.  일부분은 참주와 빌라도, 로마 황제에게도 상납해야 한다.  유월절 유대인의 가장 큰 축제일에 예수는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골고다 언덕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 보며, 홀로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부활이후 적극적으로(?) 순교 한다.  최초의 순교자 야고보는 헤롯 대왕의 손자 헤롯 아그리파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졌다. 베드로는 선교를 위해 로마까지 갔다.  베드로는 예수와 같은 방식으로 죽을 가치조차 없다고 말하자 로마인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아 죽였다(물구나무 서있으면 피가 머리로 쏠릴때의 고통을 아는데, 거기에 십자가 형이라니…).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러시아, 그리스에서 전도하다 그리스 서부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드레는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추정되는데 ‘성 안드레의 십자가’라고 하는 X자 모양의 십자가는 현재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깃발 문양이다.


의심 많았던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찔려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바돌로매는 이집트, 아라비아, 이란에서 전도했고 인도에서 산채로 가죽이 벗겨진 뒤 참수당했다.  열심당원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전도하다가 톱으로 몸이 잘려 순교되었다.  빌립은 터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양 발목에 갈고리가 박힌 채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시장에서 물고기를 이렇게 말리곤 하는데…).  천둥의 아들 요한은 로마군에 붙잡혀 그리스 밧모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거기서 요한복음을 집필했고, 요한계시록도 썼다.  그는 94세까지 살았는데 순교하지 않은 유일한 제자였다.


초기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톱으로 산 육신을 썰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창에 찔려 죽었다.  역사적 문헌에 의하면 온전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건 대략 3년의 기간이 걸렸다.  초기 그가 진정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는지 질문하고 관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지 행동을 보면서 함께 했다.  그 다음 문답교리를 통해 최종적으로 침례를 행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 전사가 되었고, 죽음조차도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313년 로마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기독교는 급속도로 권력화 세습화 되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공무원이나 군인이 될 수 없었다.  지배층인 왕과 귀족들이 3년이란 세월동안 가난한 자를 위해 재산을 나누어 줄리 만무했다.  기독교는 속성으로 왕을 위해 일주일간의 문답을 통해 기독교인으로 인정했다.  기독교는 그렇게 차츰차츰 변질이 되었고,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리된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어부, 세리 등이었다.  권력과는 1%도 상관없는 약자였다.  그들이 2000년이 지난 지금 변할 수 없는 진리로 우리와 함께 한다.  예수는 낮아지라고 하지만, 우리는 높아질려고 한다(교회안도 마찬가지다).  예수 정신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버렸을까?


이 책은 복음서에 나온 횡단면의 흩어진 서류들을, 역사로 보여준다.  로마, 유대, 제사장, 예수에 대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가서 보게 하는 힘이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 처럼…


예수는 우리의 극심한 아픔과 고통, 고독을 충분히 뼛 속 깊이 이해한다.  우리가 힘들고 고통스러울때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 심정도 이해한다.  우리의 아픔은 예수 안에서 충분히 위로 받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실체가 없는 하나님을 확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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