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전연명의향서 - 죽음을 인식하면 삶은 다시 정의된다
김지수 지음 / 북루덴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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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중환자실에 누워 천장 텍스의 구멍을 헤아리고 있을 때였다. 서늘한 느낌이 들어 팔뚝에 달린 주삿바늘을 살펴보니, 주렁주렁 연결된 투명한 전깃줄 내부에서 붉은 것과 허연 것이 뒤엉키고 있었다. 전선을 따라가 봤다. 형형색색 놀이동산 풍선처럼 매달린 마약성 진통제, 영양제, 이름 모를 수액들. 생명 없는 것들이 생명에게 숨을 불어넣는 아이러니가 우습게 느껴질 때쯤 하얀 천장에서 검정 벼락이 쳤다. 미세 신경 따라 세포 하나까지 온전히 전달되는 구체적인 감각에, 나는 내가 낯설어졌다.

 

살아 있다는 것. 이 표현의 낯섦이 갑자기 나를 후려친다. 마치 그 표현이 그 누구에게도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에밀 시오랑은 그때의 나를 보고 이 문장을 쓴 걸까. 모든 것이 충만한 삶에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죽음. 그 사이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 나는, 형량이 확정되지 않는 미결수처럼 병실에 머무른다. 경계에 선 다른 사람들과 그들에게 내려진 선고를 청취한다. 삶 또는 죽음이라는 명료한 이분법은 법칙에 어긋난 교집합을 억지로 지워간다. 선명한 사람들 사이에서 흐릿한 사람들을 배제한다. 그렇게, 처음부터 태어난 적 없던 사람이 된다.

 

중환자실은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에 속하는 곳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정상 세계에서 유리된 다른 공간들. 일반적인 공간과는 다른 논리와 질서를 가진 이질적인 장소. 사회는 이곳에 애매한 사람들을 가둬두고 아름다운 세상이라 명명된 함수를 증명한다. 살아있는 사람은 어쨌든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죽음을 오래 보고 느끼는 일은 아무래도 불가능하니까.

 

죽음은 도처에 있으나 사람들의 눈과 귀는 편집된다. 채널을 돌리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자극적인 보도가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오랜 간병 기간과 환자들이 겪는 통증은 반쯤 접혀 원무실 서랍에 차곡차곡 정리된다. 그리하여 통증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건 개인적인 일이 된다. 홀로 견디는 시행착오는 사실상 답이 없다. 죽음을 두 번 경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일분일초마다 겪는 통증은 늘 최초다. 아무는 게 불가능한 생채기에 눈처럼 하얀 소금이 뿌려진다. 비틀리는 허리와 꺾이는 표정. 입은 물속에서 뻐끔대며 소리친다. 목구멍에 고여버린 나지막한 소음. 축 처진 몸은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으로. 과연 이 과정에 인간다움이 존재할 수 있을까. 진통제 효력이 떨어질 때마다 초열지옥(焦熱地獄)으로 추락하여, 골절된 짐승처럼 웅크린 채 차라리 죽음을 바라는 자에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요.”란 말을 할 수 있을까.

 

김지수 작가의 나의 사전연명의향서를 읽었다. 보건의료 전문기자로 활동하며 쌓아온 전문성을 배경 삼아, 작가 자신에게 아로새겨진 깊은 상처로 조금씩 쌓아 올린 구원의 성채. 작가는 자신의 우울증을 숙고하고, 트라우마가 되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천천히 회상한다. 중환자실과 호스피스 병동에서 만난 경계에 선 사람들에게서 아버지를 본다. 어린 시절 기억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표정을 본다. 실오라기 같은 근육의 어긋남을 보며 아버지의 표정을 감각한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존엄을 발견한다.

 

죽고 싶은 생각에 시달리는 삶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삶으로 바뀌면서 일상의 위대함을 깨닫고 존엄한 삶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됐다.”

 

문득 존엄사랑의 다른 이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단순한 행정 서류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기 위한 안내서다. 죽음을 고민할수록 삶은 찬란해지는 법이다. 경계인은 양 눈으로 이쪽과 저쪽을 본다. 대부분은 멍하니 보고만 있으나,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 이를테면 고통을 겪는 한 사람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눈을 크게 뜨고 태양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일.

 

책 속 후두암 말기 환자가 그랬다. 아무런 보상도 없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고통을 이겨내며 인터뷰하는 그의 모습. 작가는 그를 본다. 나는 작가를 보며 무언의 신념을 느낀다. 아버지의 사랑과 작가의 인간애가 겹치는 장소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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