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둘이 북클럽 - 우리 둘이 주고받은 마음의 기록
변혜진.연재인 지음 / 도토리책공방 / 2024년 12월
평점 :

모두가 꿈꾸는 그런 일들이 있다. 간절히 원하지만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그것. 흔히 버킷리스트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이건 사람마다 다르다. 그리고 같은 사람이라도, 세월이 지나면서, 상황이 바뀌면서, 그것 또한 진화한다. 진화는 발전이라기보다는 적응이라고 했다. 구석기 시대의 우리 조상들이 혹독한 그들의 삶에 적응하려 노력했듯이, 나 또한 2024년 12월의 삶에 적응하려 노력 중이다. 지금 이 시점에 나를 끝없이 시험하는 건. 바로 우리 딸이다.
딸이 태어났을 때, 나도 버킷리스트가 생겼다. 아,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이 버킷리스트는 고등학생 때 ‘로얼드 달’의 동화책 《마틸다》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주인공인 ‘마틸다’는 책을 좋아하는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다. 무려 네 살 때 찰스 디킨스 전집을 독파한 무시무시한 천재.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기 혼자 도서관을 들락날락하는 꼬마를 보며,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아마 그때부터였지 싶다. 먼 훗날 내게 아이가 생긴다면 분명 ‘딸’일 거라는 확신을 하게 된 건. 이에 더해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 딸이 독서를 좋아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겨난 건.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실제로 딸이 태어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내게 어떤 시련이 닥쳐도 딸에게 책을 열심히 읽어주겠노라고.
실패했다. 아니, 계속 실패하는 중이다. 독서에 익숙한 나와, 독서를 이미지로 볼 수밖에 없는 다섯 살 딸이 같을 수가 없건만. 나는 자꾸만 나의 시선에서 딸을 바라본다. 그러니 계속 어긋날 수밖에 없다. 독서의 유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우리 딸도 이런 삶을 일찍 경험하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것이 마땅치 않다면 힌트만이라도. 이런 마음으로 유튜브를 찾아보고, 도서 목록을 뒤적인다. 제목에 낚여서 들어가 보면 거기서 거기. 이론적인 이야기들. 양육자가 진짜 책을 좋아하는 상황에서 말하는 것인지 의심되는 발언들. 어떻게 하면 좀 쉽게 책 육아가 할 수 있을지 요령만 알려주는 책들. 공허했고 맹목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른바 ‘책 육아’를 설파하는 선지자들에게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러다가 ‘변혜진⸱연재인’ 작가가 쓴 《단둘이 북클럽》을 만났다. 책 좋아하는 엄마와 초등학생 딸이 쓴 독특한 책. 이 책은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나이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까지, 어렵게만 느껴지는 서양 고전문학을 재미있게 읽고, 삶에 적용해볼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냥 여기까지였다면 서가에 꽂힌 다른 ‘책 육아’ 책과 다를 바 없었겠지만. 이 책의 진가는 이런 결과에 다다르는 과정에 있다. 일단, 작가는 딸과 북클럽을 만든다. 그러니까 시작부터 위계를 없애는 거다. 같은 회원으로서 같은 고전소설(다른 번역본)을 읽고 서로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문자 혹은 이메일을 주고받는 일보다 번거롭고, 무엇보다 진부하게 느껴진다. 느릿느릿 생각을 곱씹고 곱씹어 물리적 실체인 종이와 펜으로 편지를 쓰고 쓴 편지를 다시 읽어서 고칠 곳을 확인한 후 우표를 붙여서 발송하는 일련의 느린 행위. 이제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작이다. 전전긍긍. 머릿속에선 보낸 편지 내용이 계속 수정된다. 그리하여, 편지 쓸 때의 자신과 전혀 다른 새로운 자신이 상대방의 답장을 만난다. 느림의 축적과 숙성. 소화가 잘되도록 곱씹어진 생각들. 작가들은 이런 지난한 과정을 무려 11차례나 거쳤다.
읽다 보면 연재인 작가의 필력에 깜짝 놀란다. 정말 이 글이 초등학생이 쓴 것이 맞을까. 하지만 놀라운 필력 너머에 반짝이는 생각은. 아이의 것이 맞다. 이를 깨닫고 나니 연재인 작가의 글솜씨에 더는 놀라지 않았다. 이 정도로 깊고 짙게 읽었고, 삶에 적용한 이의 글이라면. 당연한 필력이라 납득했기 때문이다.
과연 이렇게 실천 지향적이면서 다정다감한 안내서가 또 있을까. 부모와 자녀 사이를 책으로 엮어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그렇게 아이가 고전에 흠뻑 빠질 수 있도록 돕는 경이로운 책. 나는 이 책을 정독하며 다시 한번 희망한다. 미래의 딸과의 독서 또한, 변혜진⸱연재인 작가의 북클럽을 닮아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