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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스타실록 - 어둠을 밝힌 불꽃이 된 사람들, 독립운동가로 보는 한국 근대사 ㅣ 한국사 스타 시리즈
최설희 지음, 신나라 그림, 김태훈 감수 / 상상의집 / 2019년 3월
평점 :
품절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사 중 가장 깜깜했던 #일제강점기 35년, 어둠을 몰아내려 스스로 불꽃이 된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읽어보았다.

문명의 빛을 내 나라로 급진 개화파
#개화파 란 나라 문을 열고 앞선 나라와 교류해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다. 임오군란 후 개화파는 개화 방법을 둘러싸고 온건 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뉘었다. 개화파란 주로 급진 개화파를 일컫는다. 급진 개화파에는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서광범 등이 있다. 이들은 눈부신 발전을 이룬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급진 개화파는 백성들에게 개화의 중요성을 알리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를 펴냈다. 또한 신식 군대를 키우고, 젊은이들이 앞선 문화를 배우도록 일본 유학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급진 개화파는 왕비를 비롯한 민씨 세력과 대립하던 중, 속도 빠른 개혁을 꿈꾸며 #갑신정변 을 일으켰다. 하지만 일본을 끌어들이고 백성의 지지를 얻지 못해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백성을 깨우쳐 나라를 구하자 서재필
관직에 올라 나랏일을 하던 중 김옥균과 박영효와 어울린 후 개화사상을 접했다. 1884년에 급진적인 개혁을 이루기 위해 개화파로서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일본으로 도망쳤다가 미국으로 간 서재필은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이름을 '필립 제이슨'이라고 바꾸고 고단한 삶을 이어 가며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결국 몇 년 뒤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 대학을 졸업했다. 의사로 일하고 미국인과 결혼도 하며 안정적으로 미국에 자리 잡던중 혼란한 조선으로 돌아 갔다. 조선에서 #독립신문 을 발행하고,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를 만들어 만민 공동회를 열었다. 근대의 길목에 서 있는 국민들을 깨우치기 위해서였다.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해방 후 귀국했고 대통령 선거 출마를 요청받았으나 거절했다. 1984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했다.




독립운동의 아버지 안창호
평생을 나라를 위해, 우리 민족을 위해 일한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로 독립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기둥이었다. '독립협회' 회원으로 만민 공동회 등 다양한 곳에서 연설을 펼치며 주목을 받았다. 연설을 통해 한국의 현실을 깨우쳐 주고 독립 의식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점진 학교를 세웠고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다 큰 어른이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초등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는 한편, 지역의 한국인들을 모아 지도했다. 캘리포니아로 옮겨 간 뒤에도 한국인들을 교육하고 지도했다. 이후 '공립협회'를 만들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본격적으로 일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신민회'를 만들고, 대성 학교와 태극서관, 도자기 회사등을 세웠다. 그러던중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사건에 관여했다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한국인 학생들을 모아 '홍사단'을 만들고 조국의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다.
1919년 3.1 만세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중요 직책을 맡아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중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일본 왕 생일 축하식에서 폭탄을 던진 일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다. 이후로도 독립운동을 이어 가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1879년, 황해도에서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열아홉 살에 천주교 세례를 받으며 '토마스(Thomas, 도마)'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일본이 한국을 점점 침략해 오는 모습을 보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돈의 학교와 삼흥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쓰고, 국채 보상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국내에서의 의병 활동이 점점 어려워지자 연해주로 건너 갔다. 일본에 맞서 싸우며 작전에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했다. 이후 열한 명의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피로써 동맹을 맺고 독립의 의지를 굳혔다.
1909년, 하얼빈 역에서 한국 침략의 우두머리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재판을 받는 순간에도 일본의 침략을 꾸짖으며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1910년, 일본에 사형 선고를 받아 교수형을 당했다. 시신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소녀의 불같은 외침 유관순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개화사항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자랐고, 신식 학교에서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1916년에 경성의 이화 학당에 보통과 3학년으로 들어가 공부하다가 1919년 3.1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4월1일에는 고향인 천안의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7년 형이라는 무거운 형벌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
감옥에서도 만세 운동을 일으켜 모진 고문과 매질을 받고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감옥에서조차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유일한 슬픔이다.'라고 부르짖던 열아홉살의 소녀는 3.1만세 운동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무장 투장의 두 거인 홍범도.김좌진
#김좌진 부유한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나 새로운 학문을 익히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가문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고 전해진다. 열일곱 살에 육군 무관학교에 입학해 실력을 기르다가 1910년 나라를 빼앗긴 뒤에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대한 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가게되었다. 만주에서 독립군 부대인 '복로 군정서'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에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후로도 강한 독립군을 기르는 데 온 힘을 쏟다가 독립운동 단체 내부에서 일어난 갈당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홍범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며칠 만에 부모마저 여의고 머슴 노릇을 하기도 했다. 군인 생활 중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기도 하고, 뛰어난 총 솜씨 때문에 사냥꾼으로 이름나기도 했다. 1907년부터 의병을 모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무장 투쟁을 벌이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대한 독립군을 세워 총사령관이 되었다. 뛰어난 전략과 총솜씨로 활약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소련으로 건너갔다. 1937년, 다시 강제로 추방당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내 죽음이 독립을 앞당긴다 윤봉길
1919년 3.1만세운동때 독립에 대한 열망을 크게 키웠다. 열 살에 덕산 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3.1만세운동을 겪고 다음해 식민지 교육을 강요하는 학교를 스스로 그만 두었다. 하지만 혼자서 한학과 한문학 등을 공부하며 학문을 계속했다. 스무 살에는 야학을 세웠고, 야학 교재인 '농민독본'을 직접 쓰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1930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세탁소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집에는 '사내대장부가 집을 나갔으니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편지를 남긴 채였다. 다음 해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건너가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과 함께 독립운동의 상황을 살폈다. 이즈음 생계를 위해 상하이에서 채소 장수 일을 하고 있었다.
1932년 4월, 일본 왕의 생일 및 상하이 침략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는 기사를 보고 김구와 함께 의거를 계획했다. 의거 날, 훙커우 공원에서 물병 모양의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 등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 자리에서 붙잡혀 같은 해 12월, 일본에서 처형되었다.
윤봉길의 호는 매헌. 매화처럼 찬바람을 뚫고 꽃을 피워 향기를 퍼뜨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윤봉길은 자신의 호에 걸맞게 독립운동이 침체되어 찬바람만 매섭게 불던 때, 스스로 몸을 던져 한국인들의 가슴에 독립에 대한 열의를 다시 퍼뜨렸다.


역사가 민족의 미래다 신채호
호는 단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외교권을 빼앗기자 관직에 나가기를 포기했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언론 활동을 펼쳤고,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동국거걸 최도통전'등 우리나라 역사 인물을 새로운 시각에서 다룬 글을 발표하며 화제가 되었다.
신민회와 국채 보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3.1만세운동이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지는 데도 참여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방향이 맞지 않아 이승만을 강하게 비판하며 임시 정부를 떠났다.
중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우리나라 고대 역사 유적지를 답사하거나 베이징 대학 도서관에서 자료를 모으는 등 독립 의식을 일깨우는 글을 써서 발표하기도 했다.
신채호는 역사가로서 '삼국사기'의 편협한 역사관을 비판하고 민족 중심의 역사관을 내세워 우리나라 역사 연구의 방향을 새로 제시했다. '조선상고사'등의 저서를 남겼다.

시로 밝힌 어둠 윤동주
중국 지린성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은 한국 사람들이 터전 삼아 기독교와 신학문을 배우며 살아가는 곳이었다. 명동소학교에 다니는 동안 문학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고, 사촌인 송몽규 등 또래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은진 중학교에 다닐때 시에 날짜를 적어 보관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38년, 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연희 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해 민족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하늘과바람과별과시 라는 제목의 시집을 만들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시 가운데 '서시'가 독립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담은 것으로 유명하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윤동주는 일본 교토의 도시샤 대학에 다니던 중 독립운동을 모의했다는 죄명으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혀 정체모를 주사를 맞으며 서서히 죽어갔다. 결국 2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후 윤동주가 만든 졸업 기념 시집이 발견되었고, 이 시집의 시에 윤동주의 다른 시들을 함께 역은 책이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면서 윤동주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독립운동의 시작과 끝 김구
열아홉의 나이에 황해도 해주 지역의 동학 우두머리가 되어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 1895년에는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얼마 뒤, 김구는 수상하게 변장한 일본인을 발견하고 처단한 일로 사형을 선고받지만 고종 황제의 특명으로 목숨을 구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안창호가 만든 신민회 간부로 활동했다. 3.1만세 운동 이후에 독립운동가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되었다. 이후 내무총장, 국무령 등 중요 직책을 두루 맡았다.
이후 임시 정부가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던 때도 포기하지 않고 1931년 한인 애국단을 결성했다. 한인 애국단의 이봉창, 윤봉길 의사를 파견하고 의열 투쟁을 벌여 일본을 긴장시켰다. 한인 애국단의 활동은 김구의 자서전인 #백범일지 에 잘 나타나 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이 되었고,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한국광복군은 미국과 함께 특수 훈련을 받으며 나라를 되찾을 준비를 해 나갔으나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여 김구와 한국광복군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와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고, 남북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평양에 다녀오는 등 나라의 운명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1949년 반대 세력으로 추정되는 안두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일제강점기 가 아닌 #독립운동기 로 불려야하는 어두운 시기
#독립운동가 들에 의해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음을 기억하고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