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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의 세계가 열리면 ㅣ 사계절 1318 문고 144
이은용 지음 / 사계절 / 2024년 1월
평점 :
하라의 세계가 열리면
어릴 때 즐겨 본 이휘재의 인생극장에서 ‘그래 결심했어!’ 라는 장면이 있었다. 내가 선택한 세계. 나의 선택이라는 중요한 결심이 있지만, 선택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운명의 소용돌이 앞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행복만 전해주지는 않았다. 행복과 고난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온다고 했던가.
선택의 세계에서 내가 선택한 것이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음을 느끼게 해 주는 건 나의 선택 뿐 아니라 나의 세계를 둘러싼 작은 사회가 작동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하라는 어렵사리 자신의 꿈을 위해 선택을 향해 나아갔지만, 하라의 선택 앞에서 보다 안정된, 보다 평온한 길을 만나게 해 주고픈 부모라는 사회는 하라에게 또 다른 세계를 만나게 한다.
유학생 부모에게서 태어나 독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 사회에 대한 기억은 거의 희미하다. 그러나 기억의 희미함은 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라가 기억하는 엄마는 하라를 걱정해 주고, 하라의 진로를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준다. 하라의 아빠는 경제적인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하라와의 추억을 나누지 않는다.
그림이 좋았던 하라가 입시의 세계에 들어가는 행위는 세계의 제약과 틀에 자신을 맞춰야만 하는 것이었다. 제약과 틀은 불분명한 무언가를 해 나갈 때 필요했지만, 하고픈 것이 분명한 사람에게 벗어날 수 없는 갑갑함을 느끼게 했다. 하라 역시 미술 입시에 발을 들이며 그림의 틀과 제약 속에 빠졌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창작의 세계에서 갑갑함은 점점 커져갔고, 그 세계는 하라가 그림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라는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었다. 그림이라는 공통점 외에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리온과의 만남.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있었고,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화물트럭을 운전하며 긴 시간 집에 머물 수 없었지만, 리온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자신의 그림을 팔아가며 도화지와 물감, 붓 등의 재료를 사며, 빼곡하게 그려진 종이는 더 이상 그림을 더할 공간조차 남아있지 않았지만 제약과 틀이 없었다. 망설임 없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가는 리온은 상황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자신이 느끼는 대로 스케치를 하고, 붓을 놀리며, 색채를 더해갔다.
회색 눈빛의 사내를 찾으러 중앙역을 헤매던 하라와 리온이 어느 순간 중앙역을 벗어나 서로의 삶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이 더 많은 하라와 리온이었지만, 서로의 삶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을 옮겨가고 있었다. 하라가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기까지 망설이던 순간들은 어쩌면 제약과 틀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청소년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행복을 꿈꾸는 과정에서 리온과 어긋나 버린 말, 그 말이 회복되려던 찰나의 순간,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 하라. 하라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고, 일반고에 진학해서도 미술을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게 되었다. 마뜩찮은 것은 하라가 아니라 하라를 둘러싼 세계였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입시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들이고 있다. 교육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보다 닥치고 대학! 이다. 대학에 가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이 자신에 대한 고민보다 짜여진 일정을 살아가게끔 하고 있다. 하라가 만난 세계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 자신을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고 응원해 주고 있는 느낌이다.
잃어버린 나를 찾게 한 세계, 하라의 세계는 하라가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