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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사랑의 대화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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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직 그 행복과 영광에의 길을 스스로 파괴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우리들의 잘못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신과 같이 완전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믿기는, 인생이란 누구라도 올라갈 수 있는 산과 같아서 그 인생의 산에 올라만 간다면, 그것으로 어느 정도의 행복과 가치는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인생의 산을 모르고 살거나, 중도에 포기해버리기 때문에 당연히 얻고 갖추어야 할 행복과 성공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소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 전연 알지도 못하는 높은 산을 정복하려는 등산객은 반드시 먼저 갔던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으며, 또 말해줄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혹시나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이 읽힌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위의 작가 서문에 명시되어있듯이 이 책은 '인생'에 대한 가르침을 연장자의 입장에서 젊은이들에게 담담하게 풀어낸다. '행복', '죽음', '영원' 등을 다시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 주고 우리들의 일생을 소년 · 청년 · 장년기로 나누어서 난관을 헤치는 방법, 성공으로 가는 팁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우리보다 먼저 인생을 경험한 사람이고 우리는 앞으로 가야 할 인생의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 모르고 있기에 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다. 물론 그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옳지 않다. 나의 신념으로 해석하고 끝없이 질문하고 나서 갈피를 잡는 것이 좋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말하는 문장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스스로 토론하며 결론에 다다르기를 반복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는 그가 어떤 문제를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보통 사람들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기피하고 두려워한다. 하지만 작가는 '문제는 삶을 삶답게 하고 사회의 발전과 향상이란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지어나가는 노력의 대가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빛을 보기 위해서는 어두움에 머물러야 하며, 선을 깨닫기 위해서는 악을 알아야 하는 것같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불행과 고통의 오솔길을 방황해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우리들에게 주어진 모든 일과 삶은 언제나 행복과 불행의 경계선 위에 있는 것이지, 결코 행복만이라든가 불행만의 생활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행복'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행복과 불행은 극과 극이어서 불행의 끝엔 행복이 있고 행복의 끝엔 불행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큰 집을 짓기 위하여서는 참으로 많은 재료가 필요하며, 제각기 모양이 다른 돌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큰 조화의 세계와 역사에서 본다면 어느 개인도 버림받거나 소홀히 여김을 당해서는 안 되는 것이 우리들의 세상이다.


인생의 경기는 마라톤과 비슷하다. 도중에 앞선다고 해서 승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최후의 결승점에서 승리하느냐가 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지 못한 것 같다고 자신을  낙오자로 정해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 자체로 비교나 차별 대우를 당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들이며 능력을 언제든지 발휘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이다.

 

생각해보면 하늘에는 제각기의 별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며 땅에는 모양과 색, 계절과 장소를 달리하는 많은 꽃들이 있어 아름다운 세상이 이루어지듯이, 인간들의 마음과 정신력도 제각기 달라 하나의 조화된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녀와 제자의 일생은 그 자체가 교육의 목적이지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백 사람이 한 가지 경기를 했을 때는 1,2,3등을 한 학생만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백 사람이 백 가지 경기를 한다면 때에 따라서는 백 명 모두가 1등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개성을 위한 교육이며 민주주의 교육의 방향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지금의 입시주의 교육은 오직 어떻게 이름 있는 대학에 입학시키는 가에만 몰두하며 학생들의 개성을 없애기에 바쁘다. 나는 그러한 행위가 한 사람의 인격을 몰살시키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민주주의 교육'의 방향에 대해 교육부가 검토하고 개혁하길 바라는 바이다.

 

파스칼이 "우주는 나를 생각할 수 없어도 나는 우주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우주보다도 위대하다"고 한 말이 바로 그 뜻이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 광활한 시간 속에서 나의 존재가 한없이 작게 느껴질 때 이 구절을 떠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최후의 문제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 짓는 것은 모든 학문과 예술과 사상의 마지막 결론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 문제를 해결 지어주었는가.
반드시 해결 지어야 할 문제이면서도 모두 자기의 문제는 아닌 듯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렇게 스스로 묻고 있는 순간에도 죽음은 찾아오고 있는데
….

 

 

작가가 학생과 나눈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저 상황에서 어떻게 말했을까? 과연 최후에서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결론은 '아니오'다. 내가 그 학생이었다면 똑같이 최후를 죽음으로 설정했을 것이고 "죽으려고 뛰어갑니다"라는 답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내가 만약 그 대화를 자리에서 듣는 학생이었다면 작가가 걱정하는 것처럼 죽음이 나의 문제가 아닌 듯 웃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과 문장을 보고 난 다음 죽음과 죽음에의 가능성이 어디에나 있고 생각보다 가까울 수 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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