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 빛의 일기 - 상
박은령 원작, 손현경 각색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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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下 편 마지막 장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편집자가 수차례 바뀌며 30부작이던 드라마를 28부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놓치고 만 감정, 뒤틀린 연결……. 그러나 이 모든 아쉬움을 소설을 집필하며 잊을 수 있었습니다. 삭제된 감정선과 중요한 연결고리까지 소설 속에서 되살려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소설 ≪사임당, 빛의 일기≫는 제게 숨구멍과도 같은 아주 소중한 작품입니다."라고 이 책을 설명했다.

 그렇다. 드라마를 본 시청자로서, 책을 읽은 독자로서 이 책은 드라마가 놓친 부분들을 메꿔준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시대와 현대 시점을 개연성 없이 오갔던 드라마 연출로 인해 정신없이 보았던 사건 발생과 추리들을 책으로 다시 접하니 나의 페이스에 맞게 속도를 조절하고 해석해나갈 수 있었다. 또한 인물들의 대사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인물의 감정선, 독백들이 세세하게 표현되어 더욱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고전적인 연출 이외에도 역사왜곡, 판타지, 불륜 등의 수많은 논란을 낳은 작품이지만 책으로 다시 읽으면서 이 이야기는 논픽션이 아닌 픽션, 즉 역사 속 인물에 새로운 스토리를 재구성해 만든, 지금 시중에 팔리고 있는 수많은 역사 판타지 책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이 포스팅을 읽는 사람들 중에 ≪사임당 빛의 일기≫를 중도 하차하거나 논란으로 인해 아예 접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한 번 책으로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그리고 지금 이 책을 읽는 중이라면 끝까지 읽고 나서 꼭 다시 上 편으로 돌아와 序章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모든 스토리를 알고 읽는 나의 마음과 모르고 읽었던 나의 마음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똑같은 나뭇잎이라도 봄의 연녹색과 여름의 진녹색, 가을의 단풍이 다 다릅니다. 햇살에 따라 바람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빛을 품는 것이지요. 그 모든 걸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저만의 느낌으로 그려내고 싶습니다! 왜 여인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이리도 많단 말입니까!"

삶이 참 어렵다. 매 순간이 풀어야 할 문제 같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막막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기에 버틴다. 답을 찾고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딸이기에, 어머니이기에,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에서 안정을 되찾는다. 눈물을 그치고 기와집 담장에 피어 있는 분홍빛 패랭이를 보며 웃어본다. 북평촌에서 보던 꽃을 낯선 땅에서 보니 더욱 반가운 것이다.

이 모든 참담한 현실이 광화문 거리를 걷는 지윤의 발목을 붙들었다.
지윤은 사임당 일기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어쨌든 눈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삶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므로.

"부끄럽지 않습니다! 적어도 저는, 제가 선택한 삶을 온전히 책임지며 살고 있으니까요!
비가 새는 누옥에, 계집종 하나 겨우 거느리고, 물기 마를 새 없이 온갖 집안일을 직접 하고 살아도,
비겁하지는 않으니까요!
제가 선택한 삶을 당당하게 책임지고 있으니까요!
최소한 공처럼 삶을 낭비하며 허송세월하고 있진 않습니다!"

은수가 천진하게 웃으며 지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지윤은 사랑스런 아들을 품에 꼭 껴안았다. 문득 이겸이 보았다는 그 따스한 장면이 떠올랐다. 자식들을 품에 안고 재우는 사임당의 모습과 새끼 강아지들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 개의 모습.
그것은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모견도의 탄생 비화였다.

"두 개의 눈, 두 개의 날개가 합쳐져야 날 수 있다는 전설의 새, 비익조 말입니다. 이는, 재주는 있으나 형편이 어려워 그 뜻을 펼칠 길이 없는 예인에게 눈과 날개를 달아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재주 있는 예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반상의 차별, 성별의 차별 없이 비익당을 개방할 것입니다."

"자, 이제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아라. 여기 이 풀벌레조차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 몫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벌레도 꽃도 풀도 바람도 그리고 시냇물조차도.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듯하나, 그렇지 않아. 이제부터 너희가 채워갈 세상을 생각하면, 이 어미는 벌써부터 가슴이 뛴단다."
사임당은 사랑스런 눈길로 아이들을 바라본다. 삶이 아름다워지고 추해지는 것은,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떤 희망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임당은 부디 자신의 아이들이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길 원한다.

먹물을 끼얹은 듯 까맣기만 하던 세상에 실낱같은 빛이 드리운다. 동이 터오고 있는 것이다. 겨울잠을 자느라 앙상해진 숲이 시나브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염료로도 표현될 수 없는 신비한 빛이 한양을 끼고 도는 한강 위로 넘실거린다. 사임당은 무연한 눈길로 절벽 너머 한양을 바라본다. 저곳에 삶이 있다. 고비마다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살아내는 그런 삶, 울고 웃으며 주어진 한 생을 꾸역꾸역 버티어내는 삶,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아등바등 살아내는 그런 삶이 저곳에 있다. 그리고 지금, 한 줄기 빛이 삶을 깨우고 있다. 사임당을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일어나 빛이 드리운 삶 속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달과 별만이 빛을 발하던 겨울 숲길 양옆으로 환한 지등이 꽃처럼 피어 있다. 뿐만 아니라, 지등이 밝혀진 길고 긴 길에는 매끈하고 하얀 조약돌이 고르게 깔려 있다. 꿈을 꾸는 것인가.

"관직이 있고 없고가 그리 중요합니까? 전국시대 사상가이며 병법가인 묵자墨子도 평생 관직에 오르지 않았으나 약자에 대한 한없는 동정으로 많은 이들의 모범이 되었고, 대시인 도연명陶淵明 또한 평생을 주유周遊하여 훌륭한 시와 글로써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종이를 만드는 일입니다. 종이는 아이들 공부에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구이고요. 그것을 만드는 일이 어찌 부끄럽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좔좔 외우라 독려해대는 ≪사서삼경≫도, 종이가 없다면 어찌 읽을 수 있겠는지요?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가 대나무에 글씨를 새긴 죽간竹簡이라도 들고 다니라는 겁니까?"

"행색은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지난 시화전엔 무명옷 차림이었고 오늘은 비단옷을 입었습니다. 하나, 저라는 사람의 본질은 변함이 없지요! 박꽃은 그 행색은 초라하나 한 덩이의 박으로 많은 식구들을 먹이기에 충분하고, 연꽃은 비록 화려하나, 그 열매는 대추나 밤만 못한 법입니다!"

"운평사 고려지를 꼭 재현하시오. 그리하여 이 종이에 그대의 그림을 그리시오! 나는 조정에서 더 큰 그림을 그릴 것이오. 썩은 환부를 도려내고, 열심히 일한 백성이 수고를 인정받고, 굶주리지 않으며 살 수 있는, 바른 세상을 만들 것이오. 그러자면 그대가 꼭 성공해야 하오. 제대로 된 고려지를 만들어, 내가 그려갈 그림의 토대를 만들어주시오!"

"어찌 그런 말을 해……. 대장간 일이 얼마나 중한데. 대장장이가 없다면 농사에 필요한 괭이며 호미를 누가 만들어줄 것이냐? 이 세상에는 선비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농민도 어부도 대장장이도 다 필요하다. 그들 모두가 어우러져야 제대로 세상이 굴러가는 것이다."
"그렇군요."
아들의 얼굴이 환해진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이 어미도, 아비도, 상감마마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제 앞에 놓인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그 작은 점들은 선이 되어 미래의 너와 이어질 거다. 그러니 매 순간, 네 앞에 놓인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지치지 말고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너 자신을 믿어라. 알겠느냐?"
"어머니……."

매창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인다. 그 모습에 사임당의 가슴이 무너진다. 맑은 눈을 가지라 가르쳤다. 눈이 탁해지면 세상을 맑게 볼 수 없다 일렀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되, 정체되지 않도록, 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야 한다 말했다. 해서 어떠한 편견도 없이 세상을 바라보라 했다. 그렇게 가르쳐왔다. 하지만 세상이 탁하고, 세상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은 알려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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