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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안 - 일본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 9인의 단편집
미야베 미유키 외 지음, 한성례 옮김 / 프라하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일본 ‘카파 노블스’ 사의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혈안」. 추리소설의 명가답게 일본에서 내로라 하는 미스터리 작가 9명의 글이 모였다. 글을 읽다 보면 어느 샌가 깨닫게 되는 9개 소설의 공통점, 50. 이 책은 ‘50’이라는 숫자 하나가 얼마나 다양하게 등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작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50주년을 기념했는데, 각기 다른 소재와 전개방식으로 가득한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다.
(1) 미야베 미유키 「혈안」
항상 소름 끼칠 정도의 현실적인 주제와 묘사, 스토리전개로 밤잠을 설치게 하던 그녀의 평소 스타일과 너무나도 다른 글이다. 마치 어느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을 소재로 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맛깔스러운 사투리와 어린 소녀의 시각에서 바라본 묘사는 ‘미스터리’한 내용 속에서도 미소를 짓게 만든다.
(2) 아야쓰지 유키토 「미도로 언덕 기담 - 절단」
‘관’ 시리즈로 워낙 유명한 그였기에 기대감을 가득 안고 책장을 넘겼다. 단편이라 길지 않은 글이었지만, 끊임없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전개에 숨을 죽이고 단숨에 읽었다. 50번을 절단했는데 51토막이 아닌 이유는……? 그것의 정체가 대체 뭘까? 주인공은 왜 그런 꿈을 꾸었으며, 어째서 기억을 잃은 걸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이 짧은 글이 나를 놀랄 만큼 몰입하게 만들었다.
(3) 시마다 소지 「신싱당 세계일주 – 영국 셰필드」
추리소설작가가 쓴 글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감성을 자극한다. 개리와 그의 아버지 콜린의 이야기는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나의 꿈, 나의 인생에 대한 열정.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큼의 노력과 의지로 개리는 ‘학습장애’라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했다. 언제부터인가 노력보다는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한탄하고 불평만 하는 내가 떠올랐다. 나의 한계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4) 미치오 슈스케 「여름의 빛」
누구나 한 번쯤 겪었거나, 옆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 친구를 궁지로 몰아세운 경험. 리이치는 친구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알지만 선뜻 나서서 변호하지 못한다. 죄책감을 느끼는 리이치에 대한 묘사는 어린 시절 옆에서 방관했던 나의 죄책감까지 이끌어냈다. 그가 그나마 나보다 나은 점은 친구의 무죄를, 알리바이를 풀어냈다는 것. 만일 내가 기억도 희미한 옛날의 그때로 돌아간다면 리이치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부끄러운 마음만 더 커진다.
(5) 모리무라 세이치 「하늘에서 보내준 고양이」
독특한 전개이다. 단편소설 안의 단편소설인 줄 알았다.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열된다.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결국은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다. 일곱 명만 거치면 전 세계인이 아는 사람이 된다는 논리가 생각난다. ‘그럼 저 멀리 아프리카에도 아는 사람이……? 아, 나의 미친 인맥……’ 하고 생각하다, 문득 드는 무서운 생각. 결론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와 연관된 사람을 만날지 모르니 말이다. 모리무라 세이치의 흥미로우면서도 매끄러운 전개방식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의 다른 작품도 빨리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6) 아리스가와 아리스 「눈과 금혼식」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소설에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등장하다니. 재미있다. 알고 보니, 그는 언제나 그의 글 속에 추리소설작가로 등장하는 듯하다. 글을 쓰면서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하기 위해 자신을 등장시킨 건지, 아니면 소설 속의 아리스가와 아리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건지. 어느 쪽이든 간에 기발한 아이디어다. 의문을 풀어나가는 방식과 결론은 생각보다 평범하지만, 한 울타리 안에 사는 따뜻하고 행복한 가족과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는 가족이라는 극과 극의 설정이 묘하게 인상적이다.
(7) 오사와 아리마사 「50층에서 기다려라」
하아…… 이런 사기가 또 있을까?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사기를 당한다. 그와 동시에 독자인 나도 사기를 당한 느낌이 든다.
(8) 다나카 요시키 「오래된 우물」예전에 무척이나 좋아했던 「은하영웅전설」의 작가가 쓴 작품이라 읽기 전부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가 여전하다. 마지막까지 추리소설로서의 긴장감을 놓지 않게 만들어 재미를 더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아루스란 전기」를 찾아서 읽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든다.
(9) 요코야마 히데오 「미래의 꽃」
시즌2까지 방영한 일본드라마 「종신검시관」의 원작소설을 쓴 요코야마 히데오의 「미래의 꽃」. 역시나 등장인물은 검시관이다. 주인공 구라이시는 병실에 앉아 경찰이 들고 온 사건현장과 시체의 사진만을 보고 사건을 풀어나간다. 그의 풀이는 사건에 대해 경찰들이 내린 결론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지만 정확한 논리와 정황을 파악한 그는 반론할 여지도 남겨주지 않는다. 구라이시의 몸은 암으로 수척해졌지만, 그의 매력적인 카리스마는 글속에 넘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