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소설을 읽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엄마를 부탁해>는 신경숙이라는 작가를 믿고 읽었다. 그의 소설 <외딴방>을 읽고 그의 저력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상투적이고 신파적 감정을 건드리는 소재인 '엄마'의 이야기를 이렇게 '적당한 거리두기'로 감정을 조절하며 호흡하는 능력은 그의 특별한 소설형식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리라.총 4장으로 구성된 이야기중 각 장마다 어머니가 '큰딸'과 '큰아들'과 '아버지'와 '작은딸'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다 종내는 '나(엄마)'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서술자 바꾸기'는 자칫 감성적으로만 흐르기 쉬운 고전적 주제를 절제있게 풀어내는 일등공신이리라. 

소설은 서울역 지하철에서 엄마가 아버지의 손을 놓치면서 엄마를 잃어버리면서 시작된다.엄마를 잃어버린 그때,큰딸은 중국에 가 있으며,둘째딸은 젖먹이가 딸려있으며,남편은 무책임하게 혼자 걸어가버리고,큰아들은 그 시간에 왜 사우나에 가야만 했는지,실종의 책임을 각장의 화자들에게 들이댄다.그것도 아주 냉혹하게 들이댄다. 사실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며 한편 진부하며, 한편 계몽적인 주제인 '엄마'의 이야기를 특별한 '엄마'의 이야기로 읽게 된 가장 첫째 원인은 바로 이 소설의 특별한 형식에 기인한 바 크다 하겠다. 

2. <엄마를 부탁해> 총 4장의 구성중 2장 <미안하다,형철아>를 읽을 때 '나의 엄마'의 모습이 많이 겹쳤다. 소설속 엄마가 장남인 '형철'에게 끊임없이 미안한 감정을 쏟아내는 장면이 있다. 장남의 꿈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도 어미의 탓으로 여기고 어린 여동생들을 시골에서 상경시켜 공부시키며 얹혀살게 하는 것도 어미탓으로 여긴다. 또한 야간대 입학을 위해 고등학교 졸업증명서를 가져다주려고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타고 올라온 엄마와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워자던 동사무소 숙직실(p92)장면을 읽으며 자식에게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나의 엄마에 대한 기억과 겹쳐졌다. 

3. <엄마를 부탁해>의 마지막 화자인 큰딸은 엄마는 원래부터 엄마인줄로만 여기다가 엄마에게도 한 여자로서의 삶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나이들어 가면서 엄마는 당연시 그렇게 가족들에게 헌신하며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사는 것이 당연한 줄로만 여기다가 엄마에게도 한 여인으로서의 삶을 인정해주며 찾아주려는 복원의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는 삶 가운데서 엄마의 자리와 위치를 얼마나 인정해 주었는지 ...... 

원래 <창작과 비평> 계간지에 실릴 때는 4장으로 끝났지만 단행본으로 엮으면서 에필로그 <장미 묵주>편이 첨가됐는데, 개인적으로는 사족과 같은 아쉬움이 든다.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상을 만나며 그동안의 엄마에 대한 절제된 작가의 감정이 엄마를 안을 또다른 피에타상을 요구하며 뜬끔없이 과도하게 감정을 주관적으로 표출하며 마무리짓는 것같아 아쉬움이 든다. 그러나 진중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분신 큰딸을 통하여 흔들리지 않고 뚝심있게 풀어나가는 신경숙의 힘에게 응원을 보낸다.그리고 각장마다 화자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있는 엄마는 마치 영화 <식스 센스>와 같은 반전감을 주는 구도상의 절묘한 배치로 소설읽는 재미를 더하게 한다. 

늦은밤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난다. 자식에게 큰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종내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안고가려는 아버지 어머니 당신의 모습 속에서 소설속 "엄마가 파란 슬리퍼를 끌며 움푹 파인 발등 속의 상처속으로 뼈가 드러나 보이네(p254)"하던 소설속 엄마의 발등속 상처보다 더 아린 당신에 대한 불효가 내마음을 아프고 쓰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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