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 개정판
한석정 지음 / 동아대학교출판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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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2, 3장에 대한 요약과 평가입니다. 인용되는 쪽이나 주석 숫자가 구판(1999)의 것이라는 점을 유념해 주시길 바랍니다. 만주 배경 영화라는걸 최근 7백만이 봤다고 하는데, 정작 만주국에 대한 심도 있는 검토는 세일즈포인트 215가 뜨고 있는 상황이라는게 말이 되지 않는 듯 하여 1권이라도 더 팔리게 해 보려고, 제 홈페이지에 이미 올라있으나(http://cafe.naver.com/abcde1/562) 이 곳에도 올리는 글입니다. 책을 더 팔리게 하려면 역시 책방에 와야겠지요.



이 논문의 힘은 만주제국이라는 중대한 사례에 포함된 다양한 성격의 요소들을 추출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 추출은 국가의 힘 · 언설 · 행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대 중국에게 중요한 것은 일본제국에 의해 건설된 식민국가였던 만주국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부정적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있다. 북경측의 공식 역사 기술인 『위만주국사(僞滿洲國史)』의 모든 장은 “무력적 억압, 파시스트통치, 통제경제, 전쟁동원, 박탈, 투옥, 식민통치, 조직적 강탈” 등의 제목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만주해 13). 이는 물론 한석정에 따르면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 특히 강화되었던 일들이다. 일본에서의 연구는 일본의 투자와 경제발전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만주해 232~233). 과연 이것이 모든 것이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한국이 지닌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라면, 박정희·김일성을 비롯한 한반도 현대사를 주도한 여러 인물들이 청년기를 보냈던 곳으로서 추적해 볼 가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탐구가 인물에 대한 전기적 탐구 이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청년기에 목격하였던 만주국의 작동 방식 그 자체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그들을 만주국과 태평양전쟁 종전 후 한반도의 상황 사이의 매개로 간주하여 접근하고자 하는 자라면 만주국 작동 방식 자체에 대한 접근이 또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리고 만주국의 작동 방식 자체야말로 다른 어떠한 것 보다 크고 일반적인 문제로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이 논문의 힘은 바로 이 지점, 만주국의 작동 방식 자체에 대해 잘 정리·분석하였다는 점에 있다. 최대의 병력을 보유하던 1933년 120303명의 병력을 보유하였던 만주국군(만주해 68: 주석 80번), 1935년 말 기준으로 무려 일본 본토보다도 11663명 더 많은 76654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하였던 만주국 경찰(만주해 93)과 같이 거의 20만 명에 달하는 폭력을 집행할 수 있는 인력이 어쨌든 명목상으로는 그 휘하에 있던 거대한 기계이며, 그 황제 푸이는 1935년 방일시 쇼와천황 이외의 거의 모든 일본인 관료(조선·대만총독도 포함되었다)와 황실에게까지 만주국 훈장을 ‘뿌려대었다(만주해 219).’ 수십만에 달하는 그 공무원들의 복장·의장에서도 독자성을 어떻게든 확보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었다(만주해 212~214). 수십만의 어쨌든 명목상으로는 독자적인 인력을 보유하였으며, 최소한 중일전쟁 이전까지는 의식적으로 독립성을 알리고자 했던 이 국가는 북경측에서 행한, 관동군이라는 정복자에 의해 건국되어 일어난 폭압적 통치를 강조하는 요약이나 일본측의 경제발전 과정의 매개로서 기능하였던 점에 집중하는 요약과는 분명히 다른 지점에서 접근할 수많은 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한석정은 그 지점을 ‘국가 효과’라고 요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약은 논문의 배치와는 반대로 오히려 수많은 자료들을 검토, 요소들을 재배열하여 이 국가가 행한 행위들을 유형화하였을 때 비로소 그렇게 요약할 수 있는 잠재성이 국가의 행동에서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정복자나 경제발전의 매개로 환원되지 않으며, 또한 논문의 1장을 통해 한석정이 참여하고자 하는 국가의 위상에 대한 논쟁에서 상대할 국가에 대한 요약으로 제기된 실체(조직이든, 폭력이든, 사회 제조력이든)로서의 국가 · 사회의 역학을 반영하는 관계로서의 국가에 대한 요약보다 국가라는 현상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국가에 대한 요약을 이제부터 추적해 보도록 하자.

폭력과 훈육

만주 국가는 힘을 두 가지 방향에서 발휘하였다. 한 가지 방면은 폭력으로 저항하는 자는 죽이고 또한 저항하지 않는 자는 훈육하여 변동시키는 것이었고 한 가지 방면은 인민에게 구호의 손길 및 조정의 손길을 내뻗어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오는 것은 폭력이었다. 한석정은 우선 만주국군의 존재에 주목한다. 초기 만주국(1936년) 25개 도시의 성비는 157.7에 달한다고 한다(만주해 59). 이는 1부 1처가 일반적인 것이 될 수 없는 성비다. 이는 중국인 이민에 의해 나타난 현상이다. 이들은 대부분 남자들이며, 계절성 이민이고, 쉽사리 불법분자 또는 ‘비적’이 될 수 있는 부랑자들이었다(만주해 58). 조선인 이주 또한 이어졌다. 이러한 불안정한 인구상황 속에서 앞서 언급된 비적이 등장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국가 생성의 근본적 조건인 폭력의 독점을 위해 식민국가는 이들을 토벌하려 한다. 이들의 힘은 분명했는데, 비적들은 무엇보다도 비적단원으로 만주 청년들을 징발할 수 있었다. 1932년 8월 해성현을 점거했던 비적단은 남녀 주민 3백명을 모두 납치하였다. 또한 이들은 기세에서도 상당하여 ‘민중자위단 총사령’을 자처하는 당취오의 부대는 통화성 성문 앞에 ‘타도 만주국’의 포고문과 지휘관 명단을 붙이기도 하였다(만주해 62~63). 이제 만주 국가는 만주 청년들을 비적화되는 것에서 지켜야만 했다. 이들은 전통 중국의 농촌통제제도인 보갑제를 살려내고 도시에도 확대했다. 반역자가 보갑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의 제제는 보갑을 이루는 모든 가구가 (아마도) 각각 2위안의 벌금을 납부하는 것이었다(만주해 64). 또한 비적 출몰지에서 주민을 소개, 격리하여 집단가옥에 수용하는 방식까지도 사용되었다. 이는 ‘비적’에 대항하여 길림성에서 나타났던 제도고, 만주국 건국 이후에는 간도성에서 조선인 비적을 통제하기 위해 조선인을 관리하기 위해 사용되던 것이었는데 이러한 아이디어가 전국에 퍼지게 된 것이었다. 집단가옥은 34년 8개에서 39년 13451개까지 폭증하였다(만주해 64~65). 흥미로운 것은 비적 진압 초기, 1200명의 비적단을 이끄는 보산의 부대가 만주국군에 편입되는 것이 거부되고 만주국군의 전체 규모 역시 감축되었던 1935년 2월까지는(만주해 68) 분명히 비적과 정규군 사이의 상호교환성이 있었으며, 이것이 만주 국가에 의해 이뤄졌었다는 점이다. 1932년에는 3천명에 달하는 부대를 이끄는 비적을 투항시켜 관직을 주었고, 각 성에 설치된 청향회라는 조직은 비적 토벌은 물론 투항 비적에게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것을 그 업무로 삼았다. 무기에 대해서도 역시 그것을 국가의 통제하에 넣기 위한 집요한 명령과 유인책이 사용되었다(만주해 65~66). 결국 1932년 30만에 달하던 비적은 급감하고, 최후의 세력인 동북항일련군은 1940년 3월 한만국경에서 전멸당한다(만주해 66).

이렇게 비적의 자원을 없애고 비적과 군 사이의 상호교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만주 국가측의 우위가 확립되자, 오게 되는 것은 1934년 이후에 실체가 확인되는, 만주군의 기강을 잡는 일이다. 1934년부터 일본인 장교가 부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 만주군 주둔군은 군벌시대와 마찬가지로 식량을 징발하고 가옥을 점유하였다. 이는 이제 엄격히 금지되었다. 게다가 관동군은 1933년 열하 침공 이후 부근 피해를 조사하고 보상금을 지불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금지에 대한 언설을 통해 생산 가능한 것은 군벌체제와 국가 사이의 차등적 이미지였다고 한석정은 요약한다(만주해 67~68). 이어 비적 진압을 위해 동원했던 비정규군 ‘자위단’역시 정리의 대상이 되었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들에게는 특수한 표시 착용이 의무화되었고, 만주국군·경의 정복을 착용하는 것 역시 금지되었다는 점이다(만주해 69). 이에 따라 차등적 이미지는 비정규군과 정규군·경 사이에서도 생산되었다. 이러한 정리는 고위직을 차지하게 된 군벌의 고위 인사들의 운명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리라. 제국은 이들을 정리하여 만주국 초기의 군사적 색체를 희석시키려 한 것 같다. 1934년 3월 푸이의 대관식은 이러한 정리작업이 단행된 시기다. 군대는 지역과 결합되 어있는 복합적이고 전면적인 조직이 아니라 전문적인 조직이 되었다. 봉천경비사령관은 제1군관구사령관으로 바뀌었다(만주해 73). 군 역시 군벌 장군에게서 일본육사를 나온 새로운 집단에게로 넘어갔다(만주해 73). 군벌 성장은 모두 퇴임하였다(만주해 72~73). 이들에게는 명예로운 칭호라는 ‘장난감’만을 받게 된 것이다(만주해 76). 폭력의 독점과 군의 기강 확립, 비정규군의 정리 및 군벌의 유산 제거를 통해 민간 관료의 실권을 증대시키고 군을 단순한 전문 조직으로 만드는 것은 한석정의 작업 속에서 분명히 사료를 통해 명확히 입증되었다. 명쾌하게 의도를 드러내는 사료로 답해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지만, 만주 청년들을 향한 교육기능을 지니고 만주국이 독립국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중대한 장치가 만주국군이었다는 한석정의 주장 또한 타당할 수 있다. 만주국의 독립성을 (만주국 총예산의 무려 30% 이상이 1931~36년간 33[28.9%], 35[27.5%]년을 제외하고는 투입되었던[만주해 54]) ‘국군’의 존재로 나타냈다는 점은 만주국 정부에 의해 강조되지는 않아서 잠재되어만 있던 것이 일본제국 내 다른 지역들과는 다르게 이들이 국군을 보유하고 있다는 언술이 사용되었다는 점에 따라 드러났다고 평가해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일반적인 만주 청년에 대한 교육 기능을 만주국군이 지니게 되려면 청년이 만주국 군인이 되는 것이 국민개병제 틀 속에서 또는 모든 인민에게 개방된 교육에 따라 이뤄져야만 한다. 만주 청년들이 특히 1934년 이후 어떻게 만주국군이 되었는지, 바로 이 점이 드러나지 않은 점이 아쉽다. 만주 청년을 향한 교육기능은 각종 시험과 같은 경찰 및 관료를 육성하고 기강을 유지하게 하는 훈련 과정에서 더욱 잘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한석정이 강조하는 것은 만주국의 작용이 군사적이지 않고 신민에 대한 훈육과 훈련을 향해있다는 지점이다(만주해 81). 이는 특히 경찰에 대해 검토하는 과정 속에서 명백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정리는 만주국이 정확히 관동군에 의해 세워진, 무력에 의한 국가이며 1931년 이후 15년이나 이어진 ‘중일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병영국가로 유지되는 것이 적절할 수 있었다는 통념에 반대되는 것(만주해 85)이기 때문에 놀랍다. 이는 만주국이 독립국가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일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관료제화는 이 선두에 서 있는데, 이는 앞서 군이 그 지역성을 제거받고 전문적 기관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그 일단을 살펴본 바 있다. 군의 지역성 제거는 지방행정관과 군 지휘관 사이의 분리를 의미했다. 또 중대한 것은 제국을 실질적으로 통괄하였던 관동군의 이름은 거의 제국의 공식문서상에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만주해 87, 주석 134번). 여기선 분명 관동군의 존재가 숨겨질 것이 의도되었다. 공식적으로 정부의 명령을 전하고 집행할 관료조직은 건국 첫해(1932)부터 엄청난 속도로 제조되었다. 이를 작동시키는 세밀한 규정 역시 구비되는 속도와 그 규정의 세밀함 모두에서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만주해 87~88). 또한 공무원의 규율에 대해 주목해 볼 만 한데, 이는 공무원의 직권 남용에서부터 휴식시간·걸음거리까지도 체크하는 엄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만주해 89~90).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민정부의 업무 범위도 또한 놀라운 것이었고, 이는 특히 오늘날 한국 정부가 행하는 센서스의 범주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넓은 범주를 다루는 광범위한 사회 조사 사업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민정부는 이 사회 조사 사업을 독려하기 위해 조사 분야별로 점수를 매겨가며 평가를 한 것 같다(만주해 91~92).

이제 수많은 조사 사업과 그에 대응하는 훈령의 집행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한 것 같은 경찰, 그리고 거대한 규모로 거대한 효과를 가져온 듯한 이 경찰을 살펴볼 차례가 왔다. 그들의 규모에 대한 서술에서 인용된 두 통계에서 그 규모 차이는 2만명 정도다(99000:76654: 만주해 93). 그러나 어떤 경우라고 해도 만주국군에 버금가는 거대한 규모이며, 일본 본토보다도 인원이 많았고 만주국의 인구는 일본 인구의 절반이기 때문에 인구당 경찰수 역시 2배 반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러한 거대한 집단이 ‘사회’에 대해 강력한 침투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만주해 93). 오히려 민간 관료의 숫자가 9천 6백여명으로 집계(만주해 94)되었고, 군인을 제외한 관료가운데 경찰의 규모는 일본의 31%를 훨씬 뛰어넘는 89%에 달했다(만주해 주석 165). 이들 경찰은 자전거 타기 지도와 개에 대한 패찰, 수레 등록까지 실행하였고, 자동차 면허증 발급·서식 배포·위생 조사·노동자 감시·청소캠페인·불순분자 감시까지도 행하였다(만주해 95). 이들을 뒷받침하는 9만 3천km에 달하는 경찰용 전신망 역시 완성되었다. 이들은 또한 엄격한 훈련을 받았고 엄정한 생활 기풍 하에서 생활할 것을 요구받았다. 심지어 경찰의 발걸음까지 체크하는 방식은 흥안성 몽정부 소속의 몽골 경찰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고, 앞서 본 집단가옥에서의 예와 같이 경찰의 기강을 통제하는 데 있어 효과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전국에 퍼져나간 것 같다(만주해 96). 이에 따라 효과를 분명히 낳은 혁신을 대하는 만주국/관동군의 태도가 개방적일 수 있었다는 점이 분명해지며, 이는 강압적 군정으로 만주국을 요약하는데 무리가 있다는 점을 다시 확실하게 해 준다. 물론 이들에 대한 훈련은 혹독한 것이어서, 수많은 해고·감봉·견책조치가 벌어졌다. 사망자도 1932~36년간 712명이었던 모양이다(만주해 97). 그리고 이러한 훈련은 급속한 것이자 새롭게 사회경험을 시작하는 청년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를 보여주는 지표는 1936년 말 경찰의 93%가 5년 이하의 경력 즉 만주국 건국 이후에 경찰이 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항이다. 또한 만주국은 건국과 함께 신속하게 신경 및 각 지방행정단위에서 경찰훈련소를 설치하게끔 하여 경찰력을 시급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만주해 94).

이렇게 경찰력에 의해 국가는 그 힘을 소소한 인민의 삶에 대해서도 주입할 수 있는 것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교육제도의 경우 물론 학교제도와 보건이라는 다른 제도적 장치에 의해서 주로 강력하게 통제되었지만, 인민의 자본주의화(조사 능력을 경찰에 대부분 의존하였으므로)와 위생화는 분명 이러한 경찰의 능력을 필수적 조건으로 하여 그 다음에 오는 것이었다. 교육제도에 대한 국가 명령의 두 축은 교과서 편찬·검열과 체육교육에 있었다. 수신修身 및 강경講經이라는 새로운 교과목이 제정되어 ‘건국정신’, ‘만주국민의 의무’, 유교 정신 등을 강조하였고, 국가에 의해 초등학교의 교과서 편찬이 이뤄졌으며 1934년 일본어가 초등과정에 포함되었다. 중등 교과서에 대한 검열도 강력하여, 1935년 135종의 교과서가 부적절 판정을 받아 폐기되기도 하였다. 문교부는 1936년의 공보에서 볼 수 있듯 모든 교과서·동화책 선정 권능을 손아귀에 쥔 것 같다. 문교부는 이외에도 다양한 훈령으로 학생과 교사를 통제할 권능을 보유하였으며, 여기에는 성장들도 일부 관여한 것 같다(만주해 98~99). 체육의 경우에도 국가의 모습은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이는 건국 두달만인 1932년 5월 2일 건국정신을 앙양하기 위한 체육대회의 개최에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국가는 체육시설 현황조사 및 개선책 연구를 명하였고, ‘국민체육운동’을 실행하였으며 1933년에는 ‘국민의 건강을 증진하고 민족협화를 실현하기 위해’ 만주국체육협회가 발족되었다. 이 협회의 지회는 각 성별로 편제되었고, 회장에는 성장, 부회장에는 성 교육청장이 앉았다. 체육활동의 관리 역시 국가의 중대한 관심사였던 셈이다(만주해 99). 이러한 체육교육은 사회교육이라는 큰 틀 속에 자리잡고 있던 활동으로 볼 수 있다. 이 분야에서 모범을 보여준 길림성은 1933년부터 사회교육을 실행하였고, 1936년 9월 12일 공보에 그 시설의 대강이 실린 민중교육관이 각 현마다 설립되어 상부에 그 실적을 보고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를 담당하는 각 현의 직원들은 성에서, 성의 직원들은 [신경의] 문교부에서 교육을 받았고, 일본 유학 역시 국가가 지원을 해 준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열하 점령(1933) 후 채 1년이 되지 않아(1934.2) 열하성 정부에서는 교육관을 건립하고 교사 및 사회교육자를 위한 특별 강습을 신속하게 실행했다는 점인 것 같다. 점령은 교사를 동반한 군인에 의해 이뤄졌다고 요약해야만 한다(만주해 99~100). 이어 한석정은 교사를 비롯한 다양한 인적자본을 빠르게 육성하고, 또한 통제하려 한 국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왕도와 건국정신을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임무를 띈 교사들은 정기적으로 세 달 가량의 강습을 받았으며, 수많은 시험을 통해 교사들은 승진과 같은 인센티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을 통제하는 권력은 학교장, (성·현공서 소속) 시학관, 그리고 교의校醫였는데, 특히 교의는 교내의 위생에 관하여 문교부에 열 가지 항목을 보고하였으며 전염병 발생시 그 판단으로 학교를 폐쇄할 수 있었다(만주해 100~101). 수많은 신민의 신체를 다루는데 있어 중대한 기예로 자리잡은 위생학의 그림자가 학교 조직에 대한 통제 방식에도 관입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교육의 확대와 인적자본의 축적의 기능은 가장 중대하게도 식민지 젊은이들의 삶의 방향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야심 있는 식민지 젊은이들은 힘든 교육과 경쟁률 높은 입시를 거치며 수험생으로서 시험을 보아 국가 조직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제국주의에 맞설 것이냐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비적들의 운명을 본다면, 제국주의에 맞선다면 비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채로 모두 소탕될 운명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젊은이들은 이 새로운 국가를 수호하는 방향으로 유도되었다(만주해 103~104).

국가는 인민에게 자본주의적 관계를 가르치는 중요한 교사다. 만주국은 (경제발전이라는 주제 때문에 일본에서 주목할 법한) 이 역할도 유감없이 수행한 것 같다. 이것은 매우 빠른 과정이었다. 역사적 요인으로 인해 토착 지주계급도 없었고, 메이지 국가의 경험을 이용할 수도 있었으며, 관동군 수뇌의 의지는 거의 제지받지 않았으므로 정책의 속도는 더욱 크게 가속될 수 있었다. 한석정은 만주국의 경제 조건 건설 방식을 네 가지로 나누어 정리한다. 일본의 거대한 투자에다가 만주국 자체의 예산도 투입된 하부 인프라 건설, 1937년부터 시행될 것으로 계획된 1차 경제개발을 위해 1936년부터 수행된 경제조사, 공채 발행 · 금융합작사라는 전국적 관제 금융기관(5위안을 1주로 설정, 모든 이를 주주로 맞아들임) 설치 조치 및 1935년 10월 공무원 월급의 일부를 의무적으로 저축하게 하는 법령과 같이 저축 증대를 통한 예금량 증대를 위한 각종 조치, 1936년 5월 반포되었으며 세금 징수의 중요성을 훈계하는 ‘국세징수법’과 같이 엄격한 훈령으로 인민에게 시장의 규칙을 가르쳐 그들을 규율하기(만주해 104~110). 이러한 서술에서 주제가 되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의 설명 비중에 있어 이 논문은 한석정이 논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다른 논문과는 다른 것 같은데, 이는 이 논문에서는 경제발전이라는 주제를 국가가 스스로를 드러나게 하는 효과의 한 양태로서, 그리고 자본주의적 관계를 인민이 체득하고 실행하게끔 유도하는, 곧 신민을 통어하는 한 방법으로서 다루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분명히 이 논문의 다양한 주제 모두를 관통하는 것은 국가는 스스로를 어떻게 드러내는가이며, 이 지점에서만 만주 국가의 다양한 언설과 행위가 어떻게 전체적으로 체계적인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발전의 매개, 교사로서만 다루는 것은 연관될 수 밖에 없는 다른 영역의 언설·행위를 괄호 속에 넣어버리게 되는 한계가 있다.

국가는 또한 체육활동을 통제했던 데에서 이미 신체에 대한 통제의 단초를 볼 수 있었듯 인민의 위생에도 심대한 관심을 쏟았다. 이는 신민 각각의 신체는 개인의 차원을 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영역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석정은 그 중대한 사례로 위생을 짚으며, 이는 특히 생체에 대한 관리가 중대한 요소로 떠오르게 된 상태를 의미하는 ‘생체정치’적 영역의 중요한 실제 사례일 것이다. 위생에 대한 훈령은 철저하고도 광범위한 것이었다. 훈령은 공중탕, 오락장, 여관, 식당, 하수구, 공동묘지, 운구행로, 매장, 음료공장, 상수도, 옥내화장실, 이발관, 푸줏간, 기녀, 우유, 소, 말, 쥐, 개 등의 상태를 감독하였으며, 특히 전염병과의 ‘전투’는 한석정의 비유를 그대로 쓰자면 비적 토벌작전과 같은 전격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전염병이 잠재되어 있을 수 있는 인간과 짐승의 신체도 통제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는 쥐잡기 운동, 전염병 환자의 이동 통제, 도축시에 보고할 항목을 자세하게 규정하는 것(색·종자·성별·내장처리 등), 개들에 대한 광견병 예방접종 패찰 부착 등으로 나타났다. 위생에 대한 훈령은 결국 신민 일반의 생활태도까지 파고들었다. 1934년 민정부에 의해 5월 · 9월의 2주간을 전국적 청소의 날로 제정하기도 했고, 시장에 대한 청결상태를 경찰이 검사하기도 했으며, 하얼빈에서는 ‘소제 규칙’에 의해 이를 어길 경우 30일의 구류가 부과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국가에 의해 검사를 받는 대청소가 이어졌으며, 또한 신체에 대하여 체육활동을 권장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통제 방식인, 일렬로 서서 ‘건국체조’를 하는 모습을 한석정은 이러한 위생에 대한 명령과 겹쳐 보여주면서 신민에 대한 국가의 태도를 지적한다. “만주국 신민들은 ‘위생 국가’에 의해 어린이 같은 대우를 받았다(만주해 110~113).”

만주국은 폭력으로 만들어진 국가지만 이처럼 경찰에 하부행정력을, 민간 관료에게 상대적으로 상위 행정력을 의존하는 국가로 전환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량의 인구와 반드시 결합되게 되며, 이에 따라 변경과 비적이 출몰하는 밀도낮은 곳으로 배치되어야만 했던 군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교육 · 경제개발 · 위생사업에 뛰어들었다. 만주국 국가는 변방의 비적과 소련·중국과 같은 적뿐만 아니라 3천만이라는 인구를 또한 그 상대로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석정이 인용한 맨은 “국가는 그 신민들 앞에 세리·징병관으로서뿐만 아니라 교사·사회사업가·버스운전사·쓰레기수거인 등 갖가지 얼굴로 다가온다(만주해 115)”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3천만에 달하는 인민의 삶 전체로 파고들기 위해 필수적인 다양한 얼굴의 사례를 앞서 보았듯 만주국은 보유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만주국은 폭력으로만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 만주국은 자신을 ‘사회’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 이전에는 사소했던 것들을 통제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을 보여주었고, 또한 실제로는 군벌 체제 내부의 문치파와 관료들을 수용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어쨌든 명목상으로는 스스로와 군벌체제 사이에 부패 정도를 기준으로 한 질적 차이를 생산하려 하였다. 바로 이 두 지점에서 만주국의 폭력으로 환원되지 않는 얼굴이 드러난다. 즉 푸코가 인용하였던, 구빈원에 수용된 아이의 증언에서 드러나는, 덕성을 신민에게 가르치는 것을 통해 신민의 동의를 얻어내는 권력의 방식과, 벌거벗은 폭력이 권력의 기제로 직접적으로 드러나던 상태와 잘 조율된 훈육이 주된 권력의 기제가 된 상태 사이의 대비를 통해 잘 조율된 훈육을 실행하는 자신을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권력으로 돋보이게 하고자 하는 권력의 방식이라는 두 지점에서 만주국은 더 이상 군에 의존하지 않고, 또한 그럴 수도 없었다. 다시 말해 다양한 침투 방법으로 정리해낸 정보와 민간 관료·경찰의 힘을 토대로 하여, 젊은이들의 일생 주기에 좀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것 · 물질적 풍요를 늘리려는 것 · 체육·위생 교육을 통해 인민의 신체를 강화시키는 것과 같은 덕성을 선사해주는 국가로 자신을 만주국은 간주했던 것 같으며, 또한 군벌체제의 권력과 ‘왕도’의 ‘건국정신’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만주국의 권력 사이에는 무절제하고 자의적인 권력과 합당한 권력 사이의 차이와 같은 형태로 둘 사이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분명 만주국에 의해 주장되었다. 이것의 유지에 있어 군은 무능력하다. 다만 민간 관료의 기강 확립 및 덕성의 실체가 문제가 될 뿐이다. 이 두 축이 붕괴된다면, 주장되던 덕성은 실체없는 것이 될 것이고 부패한 관료와 경찰은 군벌처럼 약탈을 일삼을 것이다.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단점이며 일어날 것이라는 가능성은 단점이 아니다(De Cive, Ⅹ. ⅶ.)”와 같은 홉스 식의 반박이 있겠지만, 이는 이 두 축을 유지하기 위한 힘겨운 싸움의 존재, 그에 따라 만주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가 필연적으로 처해 있을 수밖에 없는 위기를 오히려 부각시키는 반박일 것이다. 중국측이 『위만주국사』에서 수행했다는 강력한 비난은 바로 이 필연적인 위기가 파국으로 치닫는 후기 만주국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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