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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마음
김유담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평점 :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 돌봄 수혜자로 살아가고 있다. 결혼하지 않았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으며 집안의 수많은 돌볼거리들은 대부분 어머니 몫이다. 나의 몫은 식사 준비의 일부, 청소의 일부, 반려동물 돌봄의 일부분. 나는 아직 온전하게 가족을 돌본, 내 어머니와 같은 경험이 없다. 홀로 돌보며 살았던 기간이 있었지만 임시적이었다. 언제든 기대기 좋은 나의 원가족을 배경으로 둔 혼자살이였다.
김유담의 『돌보는 마음』이 비추는 돌봄노동의 현실은 싸늘하다. 돌봄 없이는 아무것도 이뤄질 수 없지만, 누구도 돌봄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나 자신을 돌보기도 바빴던 무한경쟁사회의 젊은 여성들이 이를 악물고 정상가족 안으로 뛰어들어 분투하고,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이들은 뛰쳐나오거나 혹은 뛰쳐나와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김유담의 이야기가 매섭다. 2030 여성들이라고 삶이 두 개 주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온전한 자신으로 살기 위해 결혼과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한다. 포기하지 않고 정상가족을 이룬 여성들은 갈림길 앞에 선다. 전업주부로 살자니 「내 이웃과의 거리」의 혜미와 같은 삶이, 꿋꿋하게 일자리를 지키자니 「돌보는 마음」의 미연과 같은 삶이 그들을 기다린다. 슈퍼맘을 넘어 초사이언맘이 되어야 하는 상황. 김유담 소설의 돌봄노동자들은 누군가를 돌보면서도 ‘돌보는 자’에 머물다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각개전투를 펼친다. 누구도 함께하자고 하지 않는 무임금 노동의 구렁텅이에서 그들의 참호전은 계속된다.
나 역시도 김유담의 인물들과 같은 삶을 목격했고, 그들처럼 살 뻔했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이모 부부의 별거로 인해 사촌 언니와 동생이 나와 함께 살았다. 우리 엄마는 「안(安)」의 큰엄마처럼 그들을 돌보았지만, 동시에 주인공의 어머니처럼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작년 겨울, ‘공’과 같은 사람과 결혼할 뻔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어냐는 내 물음에 ‘가족’이라고 대답했던 남자. 아이를 갖고 싶다는 그를 사랑했던 나는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어린이집과 베이비시터를 검색했다. 아이를 갖고 싶은 건 그였지만 돌봄에 대한 걱정은 오롯이 나만의 몫이었다. 결국 나는 그의 가족이 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만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조리원 생활도, 베이비시터에게 아이를 맡기고 CCTV를 바라보며 의심하는 워킹맘 생활도 모두 내 삶이 될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나는 나이 든 부모님을 돌보게 될 것이다. 형제자매가 없어서 부모님에 대한 돌봄을 나눌 사람은 없겠지만, 나보다 덜 돌본다고 원망할 사람도 없다. 담담하고 씁쓸하다. 「입원」이나 「특별재난지역」도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은 앞으로 더 자주 발생할 수 있고, 부모님과 손녀까지 모두 돌보면서도 누구 하나 고맙다는 사람 없는 일남의 모습이 먼 미래의 나일 수 있다.
「안(安)」의 큰엄마처럼 손이 닿는 이들을 모두 돌봐도 돌려받기는 어려운 게 돌봄이다. 여성들이 큰엄마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기다리는 사회, 그리고 주인공의 엄마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돈까지 잘 벌어야만 인정받는 사회에서 돌봄과 돌보는 사람들은 멸종위기종이 되고 만다. 돌봄노동을 시장에 맡긴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 요양병원 이야기는 차치 하더라도, 계산된 돌봄 속에선 「안(安)」 의 새언니처럼 가진 재산의 크기에 따라 대접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안위를 맡겨야 한다. 그런 미래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적어도 돌봄을 받길 바란다면 돌보아야 한다. 돌보는 일이 서툴다면 돌보며 배워야 한다. 조금 더 지극한 사랑을 가졌다고, 돌보기에 익숙하다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몫까지 미뤄서는 안된다. 그것이 서로를 돌보는 사회의 첫 단계가 아닐까. 돌봄은 서로를 지극하게 사랑하는 마음의 실천으로 자리해야 한다. 너무 이상적이기만 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돌보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회가 되어가는 길에 김유담의 『돌보는 마음』이 징검다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