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가
아사이 마카테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의 격동 속에서 안타깝게 헤어져야 했던 남녀의 애절한 사랑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하기에는 이 소설이 담고 있는 고귀한 분위기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음이 안타깝다.

자연을 본 땄으면서도 절제의 미가 살아있는 일본식 꽃꽂이 같은 소설이랄까.



19세기 후반 개국 전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연가>는 여류소설가 미야케 가호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결혼 후에도 명성과 부를 누리며 남부럽지 않은 생을 살아서 그런가 새로운 소설이 잘 쓰이지 않던 차에 가호는 일본 고유의 시를 배우던 시절 스승인 나카지마 우타코가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을 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스승을 찾아간 그녀는 스승의 부탁으로 쌀쌀 맞지만 일처리는 확실한 스승의 하녀 스미와 함께 스승의 문서들을 정리하던 와중 스승이 남겨둔 젊은 날의 기록을 발견하게 되고, 소설 속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카지마 우타코, 그녀의 본명은 나카지마 도세로 에도의 여관 이케다야의 외동딸이다. 가업을 잇기 위해 마음에 차지 않는 남자들과 선을 보는 생활을 이어가던 중 그녀의 마음에 팍 꽂힌 남성이 있었으니, 미토 번의 무사 하야시 모치노리. 한번 밖에 보지 못한 남자에게 마음이 빼앗겨 상사병을 앓던 도세는 강아지를 잃어버린 것을 우연히 모치노리가 발견하고 찾아준 것을 계기로 그의 눈에 들게 되고, 두 사람은 그 이상의 만남도 없이 서로를 그리워하다 끝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어울리지 않는 무사 집안에 시집을 가는 것을 반대하던 어머니도 도세의 굳은 결심과 모치노리의 솔직함에 내키지 않는 마음을 열게 되고, 그렇게 도세의 결혼 생활이 시작되는데.


비교적 예법에도 자유롭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던 부유한 상인 계급인 조닌이었던 도세는 겸약하고 매사 예법에 철저한 무사 집안에 들어가 갖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남편은 수시로 타지에 나가 집에 오는 날이 손에 꼽고, 시누이 데쓰와도 갈등하며 기다림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던 도세. 귓동냥으로 듣는 정보에 의하면 남편이 속한 미토 번은 대대로 교토에 있는 황실을 모시며 황제의 뜻대로 외세를 배척하고 쇄국하는 존왕양이 지지 세력이었다. 하지만 전임 번주 나라아키의 개혁으로 불만을 품은 상층 무사들은 막부 체제를 유지하려는 뜻을 품은 좌막파 성격의 '제생당'파로, 나라아키와 존양론을 지지하는 중하층 무사들은 '천구당' 파로 갈려 치열한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모치노리는 천구당 파의 리더이지만 도세의 영향 탓인지 개인적인 신념이 달라서인지 점차 민초를 생각하고 양이보다 현실적인 방식을 검토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하지만 천구당 내 급진적인 강경파이자 시누이 데쓰의 정혼자 고시로는 가혹한 세금 수탈로 힘들어하는 농민들과 함께 현재 우유부단하기만 한 번주를 바꾸려는 반란을 일으키고, 천구당과 제생당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천구당의 식솔들은 제생당에 의해 옥사에 갇히게 되는데, 그 곳에서 지옥보다 못한 비참한 생활을 1년 가까이 이어가던 도세와 시누이. 매일 처형이 이뤄지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 도세는 남편 모치노리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결연한 의지를 다잡는다. 하지만 남편의 생사에 대한 소식은 들리지 않고, 도세는 옥에서 풀려나 시누이와 함께 에도로 도망쳐 남편과의 재회를 기다리는데.


그렇게 세월이 흘러 와카를 짓는 가인 우타코로 불리며 명성을 얻은 도세. 제생당 파에 대한 원한이 가시지 않는 그녀는 오랜만에 찾은 미토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는데. 


사실 외피만 사랑 이야기지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기 전 막말의 이권 다툼과 신념과 현실 사이의 갈등, 이루지 못한 대의 등 일본 근대 역사의 한 줄기를 훑는 시대 소설이다. 



"죽으려고 돌아온 남편을 이 여자는 왜 설득하지 못했을까.

할복이 사무라이의 명예라고 말하며 흥분하는 남편을 도롱이와 삿갓으로 변장시키고 왜 먼 곳으로 도망치지 않았을까.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길은 없었을까.

그렇게 싸우는 길은 없는걸까.

사무라이의 긍지와 뜻을 버리고 나와 함께 조용히 살아 주실 수 없나요?"

아사이 마카테 <연가> p276 / 북스피어


조닌 집안이라는 배경을 가진 발랄한 말괄량이라는 여주인공 캐릭터의 특성상 당시 신념을 위해 목숨을 아깝게 여지기 않았던 무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색다르다.


사무라이면 당연히 지켜야할 충절에 대한 부조리함을 꼬집는게 너무 통쾌했다.

이렇게 삶의 의지가 강했기에 도세는 끝까지 자신의 님을 마음에 품은 채 살아남아 자신의 뜻을 끝내 이룬다.


여류작가 미아케 가호와 현재 일본 화폐에도 새겨져 존경받고 있는 히쿠치 나쓰코, 그리고 역사 속에서는 한 줄 밖에 등장하지 않았던 히쿠치 나쓰코의 스승 나카지마 우타코를 살아 숨쉬는 캐릭터로 살려낸 작가는 당시 남편에 종속되어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여성의 삶을 보다 독립적이고 강인하게 그려낸다. 요즘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재해석된 트렌디한 시대소설이지만 여전히 결혼 생활은 남편을 기다리고 그 뜻을 거역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혀 답답함이 없는 건 아니다.



왜 작가는 액자식 구성을 택했을까? 

도세의 젊은 날을 회상하기 위해서는 그의 제자 가호의 시선을 빌렸고(물론 이건 이야기 상의 반전을 위해서였다),

개국 전 각 번에 속한 사무라이의 이권 다툼을 거기에 관여하지 못한 아녀자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더 감정적으로 절제된 느낌으로 사건의 부조리함과 별 것 아닌 신념에 애먼 목숨을 바쳐야 했던 사람들의 허망함을 바라볼 수 있는 것 같다.



"재정이 넉넉한 가가 번은 기질이 대범하더군. 온난한 사쓰마와 조슈도 주머니가 넉넉하지.

하지만 미토는 번이나 사람이나 다 가난했어. 미토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너무 진지해.

검소함을 너무 받들어 융통성이 없어졌고, 그 울분을 내분으로 터트리고 만 거지.

지나친 가난과 억압이 무서운 까닭은 사람의 품을 좁혀 버리기 때문이야.

품이 좁아지면 자기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고, 뒤탈이 두려워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 모르게 되지.

생각해보면 교토의 조정 고관들은 또 얼마나 가난했나.

그러나 막말 동란기에 계략을 품은 제번으로부터 돈을 받고 멋대로 칙령을 내려서 정치가 혼란해지는 원인을 만들었겠지."

아사이 마카테 <연가> p332 / 북스피어


일본 역사에 문외한이어서 따라가기 힘들 법한 스토리인데 책 앞 뒤, 그리고 간간히 TMI라 싶을 정도로 상세하게 주석이 달려있고, 일본의 전통 문화에 대한 주석도 자세해서 이해가 쉬웠다. 


다만 너무 많은 주석은 가끔 감정 이입을 방해할 때도 있어, 각 사건에 대한 소개는 별첨으로 빼뒀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들지만, 오랜만에 읽은 로맨스가 역사적 배경까지 탄탄해 만족스러웠다.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에서 출판사 도서 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