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공격과 수비
안정효 지음 / 세경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번역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처음 번역 수업을 들었을 때가 난다. 번역이 흔들린다는 말을 듣고 펑펑 울며 잠을 잤던 날, 내가 아는 어미가 이렇게나 없었구나! 실감하며 좌절했던 날, 저만치 앞서 나가는 다른 수강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번역가가 되기는 할까 고민했던 날. (아직 번역가라는 직업의 발치에도 다다르지 못해서 계속 고민과 좌절을 반복하지만 아주 건강하게 되살아나는 중이다!) 번역의 공격과 수비를 읽으며 그날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정말 번역 수업을 듣는 듯했고, 정말로 혼나는 기분이었다. 이 책에서 안정효 번역가는 본인의 수업을 수강한 학생들의 이름을 밝히고, 그들의 과제를 보여주며 이 부분은 엉망이고, 이 부분은 더 엉망이며, 이 부분은 말도 안 되게 엉망이다! 라고 말하는데, 이를 보면 아이고, 저분 어떡하냐라는 말과 동시에 아이고, 나 어떡하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저자 안정효는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기자 생활을 거쳐, 한국브리태니커 편집부장을 지냈다. 130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고 제1회 한국번역문학상을 받았으며 수많은 소설까지 썼다고 하니 그야말로 우리말 달인이겠다. 그러니 아이고, 나 어떡하냐중얼거리면서도 끝까지 읽어 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책에서 저자는 영문을 던져주고 번역해보라 한다. 그리고 수강생들이 작성한 번역문을 보여주며 이건 오역, 이건 번역투, 이건 문장호응이 이상해, 라고 잘못된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번역한 글도 제시하며 잘된 번역문이란 어떤 글인지 알려준다. 영어 번역을 다루다 보니 다른 언어를 번역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책을 백분 활용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번역할 때 조심해야 할 요점들은 충분히 얻어 가리라 본다. , 저자는 기술적 요점뿐 아니라 번역가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누차 이야기한다. 정말 번역 수업을 듣는 듯 저도 모르게 밑줄을 긋고 필기하게 된다.

 

번역가가 되기란 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말은 태어날 때부터 써왔고, 다른 나라 말 하나만 할 줄 알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번역과는 생판 다른 전공을 하던 사람도 번역가가 되지 않는가. 그러나 다들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번역서를 읽다 왜 이리 글이 안 읽혀?’ 하는 일 말이다. 마치 한국어로 된 영어를 읽는 기분. 그럴 때 우리는 슬쩍 번역가의 이름을 확인한다. , 번역가라는 직업은 얼마나 무서운가. 세상 불특정 과장님들에게 자기 성과물을 검토받는 셈이다. 그래서 번역가의 세계는 항아리 같다고 한다. 밑둥에는 번역에 발을 들인 사람이 득실득실하지만, 주둥이까지 올라가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고. 번역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호리병 입구까지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 길에 번역의 공격과 수비가 수단이 되리라 믿는다.

 

(‘있을 수가 없는 것’을 지켜 글을 써봤습니다, 선생님.)

적어도 무슨 책을 번역하여 출판을 한다면, 번역자는 그 책을 읽게 될 모든 독자보다 모든 면에서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 저자 또는 역자라면, 학교의 선생님이나 마찬가지인데, 책을 펴낸 역자가 독자보다 뒤진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P21

대부분의 경우, 어떤 어휘나 표현이 식상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 말이 너무 ‘튀기‘ 때문이다. 튀는 표현은 지나치게 눈에 잘 띄고, 그래서 몇 번만 사용해도 어느새 눈에 거슬려 벌써 낡은 표현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가능하면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리는 보호색과 같은 어휘를 구사하는 것이 좋다. - P43

어떤 사람이 글을 쓸 때는 무슨 형식의 문장을 어떤 어조로 어떻게 쓰느냐를 결정할 때 저마다 목적과 상황을 고려한다.
...
그러니까 문체의 번역은 어디까지나 수비적이어야 한다. - P57

따라서 번역에 사용할 어휘의 수준을 고정시켜야 하고, 일단 그렇게 테두리가 정해지면 한 작품의 번역이 계속되는 동안 모든 어휘가 균형을 맞춰 질서 정연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의 단원 속에서는 다른 어휘들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튀는 단어가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 P92

때에 따라서는 공격적인 기교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나친 기교는 주변의 다른 어휘나 문장과 궁합이 맞지를 않고, 그래서 어휘의 행진에서는 줄도 안 맞고 발도 안 맞는 결과만 초래하기가 쉽다. - P108

그리고 이렇게 원문의 사건이나 상황을 머리 속에 그려보면서 외국어 단어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상상 속의 등장인물들이 한국에서 똑같은 상황에 처해 우리말로 주고받는 얘기, 또는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얘기가 우리말로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 들어보는 습성, 그것이 ‘귀로 하는 공격적인 번역‘이다.
작가도 마찬가지이지만 번역가는 그래서 평상시에도 사람들이 하는 얘기에 늘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 직업이나 나이 또는 성격 등에 따라 사람들의 말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관심을 가지고 늘 귀를 기울여 들어보고, 번역에 임할 때는 그런 생생한 어휘를 활용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 P157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사람이라면 국민의 언어 습성을 바로잡아야 하는 책임을 어느 정도 저야 하는데,... - P196

항아리에서 나온 사람들, 참된 실력에 바탕을 둔 그들 번역가들에게는 정년퇴직도 없다. 번역의 실력은 아무리 나이를 먹더라도 좋아지기만 할 따름이지, 퇴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P368

이미 외래어로 굳어버린 단어라고 해도 가능하면 우리말을 다시 찾아쓰거나, 필요할 때는 새로운 말을 만들기라도 해야 한다는 원칙 또한 필자는 번역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 P4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