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 - 최정희.지하련 단편선 한국현대문학전집 (현대문학) 18
최정희.지하련 지음, 박진숙 엮음 / 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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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문학전집 20권 중 여성 작가의 작품이 담긴 유일한 책이다. 심지어 365페이지짜리 책 속에 두 여성 작가의 글이 실려 있다. 여성이 소설가라는 꿈을 실현하기가, 그리고 이를 끝까지 지켜내기가 얼마나 힘든 시대였는지 문득 실감했다. 엮은이 역시 그 시대를 안타까워했음을 알려주는 해설 제목을 달았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어라...? 분명히 이 제목을 어디선가 봤다. 바로 얼마 전에 읽은 보랏빛 문예지, 미스테리아41호이다. 홍한별 번역가는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제목으로 이러한 글을 썼다.

 

책을 읽는다는 것, 책과 나만의 사적인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는 것이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거울 단계를 거쳐 자아를 갖게 된다. 또 독서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 자신을 놓아보는 경험이다. 독서를 통해 인식을 확장하고 사회적 의식을 갖추게 된 여성은 가정 영역 안에만 머무르기 어려워질 수 있다. 따라서 여성의 독서는 가정을 돌보는 본분과 상충하지 않도록 적절히 통제될 필요가 있었다.

 

이 글을 다시 읽고 보니 더욱 궁금해진다. 최정희, 지하련 두 작가의 소설, 그리고 두 작가의 생각이 말이다.

 

두 작가는 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같은 이야기로 글을 쓰기도 했다고. 그런데 두 작가의 초점은 판이하다. 최정희는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해 주로 이야기한다. 그 운명에 반역하지 말아야 하고, 운명과 맞서 싸워가며 사는 것이 괴로워도 즐거운 삶이라고 말이다. 최정희가 이렇게 외부 환경에 중점을 두었다면 지하련은 내부에 집중한다. 저 인물은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내 모습에서 자신의 약점을 발견했기 때문은 아닌가? 어째서? 어떻게?

 

, 이해된다. 책 읽는 여자가 왜 위험한지. 비단 여자뿐 아니다. 책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해 생각한다. 성장한 사람은 타인을 위로하고 삶을 긍정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물론 잘못된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최정희는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한다). 근래에 여성 작가들이 서점가를 휩쓴다는 기사를 자주 본다. 위험한 여자들이 늘었나 보다. 100년쯤 지나서 21세기 문학전집이 나온다면 그때는 여성 작가들의 이름을 많이 만나볼 수 있을까. 2세대 작가라는 최정희, 지하련과 지금 작가들이 내는 목소리를 비교해보는 일도 참 재미있을 듯하다.

"전 괴로우면서두 그대루 제 앞에 던져진 운명과 싸워가며 사는 것이 즐거운 때문입니다. 거기서 벗어난다는 건 제 양심에 다시없을 고통일 것 같애요." - P78

그러니까 운명은 제 손으로 좌우할 수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내가 지금 짊어진 운명도 내 손으로 처리하면 그만 아닌가. 옳다, 그이는 분명히 내게 무슨 암시를 주느라고 책을 빌려준 게다. 나는 내 운명에 반역할 것이다. 운명이거니 하고 단념하려는 자는 자멸한다지 않았나. - P96

"탈선이래두 좋아요. 전 제 운명을 제 손으루 개혁하겠어요." - P116

...어떤 이들은 좀 어떻게 해서 좀 어떻게 잘 살 도리를 해보라고 하지마는, 좀 어떻게 해서 좀 어떻게 잘 살 도리를 하기보다 이대로 사는 것이 즐겁다면 이대로 살 밖에 없는 것이다.
가난하고 평탄치 못한 길을 걸어오면서...... 나를 구원할 자는 하느님도, 부처님도, 마리아도 아니고 나 자신임을 안 것뿐이다. - P229

‘자기의 약점을 남에게서 발견하고, 노한다는 것은, 너무 부도덕하지 않은가?‘ - P275

이것은 앓는 사람의 병이 점점 차도가 있어감을 따라, 반대로 차차 멀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보아 잘 알 수가 있었다. 요컨대 이것은 ‘산다‘는 데서, 비로소 ‘죽는다‘는 사실 앞에 양보한 ‘자기‘들을 각기 찾으려는, 어떤 잠재한 의식의 표현 같기도 했다. - P301

"......난 너무 오랜 동안을 나만을 위해 살어왔어. 숨어 다니고 감옥엘 가고 그것 다 꼭 바로 말하면 날 위해서였거든. ......이십대엔 스스로 절 어떤 비범한 특수인간으로 설정하고 싶어서였고, 삼십대에 와서는 모든 신망을 한 몸에 모은 가장 양심적인 인간으로 자처하고 싶어서였고......그러다가 그만 이제 제 구멍에 빠져 헤어나질 모서는 시눙이거든-." - P330

그는 무어라 얼른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었다. 설사 소년의 보드라운 가슴이 지나치게 ‘인도적‘이라고 해서 이상 더 ‘미운 자를 미워하라‘고 ‘어른의 진리‘를 역설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내가 약한 탓일까, 반성해보는 것이었으나, 역시 ‘복수‘란 어른의 것인 듯싶었다. 착한 소년은 그 스스로가 너무 순수하기 때문에 미처 ‘미운 것‘을 가리지 못한다, 느껴졌다. - P336

그야 ‘무식하다‘는 말에 상구도 내가 노염을 띈 대답을 하려면-소설에 있어 천하 더러운 병이 그 너무 유식하고 싶은 병일게라-고, 말할 수 있을게고, 또-아무리 유식한 사람이라도 그 유식한 것이 그대로 나와, 소설이 제대로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본시 소설이란 그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리는 게 소설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내 하고 싶은 말들이 나와서 능히 살 수 있도록 ‘집‘을 짓겠느냐,는 것이 소설일 게라고 말할 수도-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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