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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2016년 고전 많이 읽기 목표를 위해 선정한 첫 번째 책이다. 전부터 읽고 싶었으나 제목에서 풍기는 섬뜩한(?) 기운에 쉽사리 집어 들지
못 했었는데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곧 결혼할 예비 신랑신부나 임신을 꿈꾸는 혹은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는 읽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모든 책에는 읽기 좋은 타이밍이란 게 존재한다. 굳이 지금 읽을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내려놓으라고~~~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꿈과 낭만이 가득한, 현실적인 문제는 생각지 않는, 아무 대책 없이 천진한 부부다. 혼전 성관계, 이혼, 핵가족, 마약
등 그들의 눈에 사회를 망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외면하고 보수적이라는 둥, 어린 시절에 말 못 할 기억이 있을 거라는 둥의
뒷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 그 둘은 많은 아이들, 가족들이 자주 모이는 화목한 집안,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애정을 나누는 부부, 너른 정원이
딸린 저택 등을 꿈꾸고 이뤄나간다. 그들이 바라는 세상이 둘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고, 그들만의 힘으로 관리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멈추었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이루려는 것을 불가능하게 보고, 세상 물정
모른다고 생각하며 비웃었던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모여 웃고 떠들 때 이 부부는 결국 그들이 옳았고 이를 증명해 냈다는 듯이 진심으로 기뻐했다.
과연 이 둘에게 왜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적게 낳으려 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자신과 상대방의 차이를 저울질하며 가족과 친지, 친구들
앞에서 나눈 서약을 어기고 이혼을 하는지 등에 대해 잠시나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싶다.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부정한 모든 것들이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고 현명하고 신중한 사색의 결과라고 치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모든 상황이 본인들이 예견한 것과 달리 진행될
경우에 대한 대책을 이다지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있다니 어찌 보면 대담무쌍하다고 하겠다.
데이비드는 떠나왔던 아버지 제임스에게 끊임없이 손을 벌려야 했고, 그가 세운 왕국은 아버지의 막대한 원조로 유지되었다. 약한 몸으로
끊임없이 아이를 낳는 해리엇은 결국 어머니 도로시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애들을 돌보고 집안을 꾸려나간다. 어느덧 아이는 4명이 태어났고, 이
위태로운 성은 바람 앞의 촛불 같았다. 마침내 태어난 다섯째 아이 벤은 해리엇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엄마를 힘들게 했고 태어나서도 남다른,
다소 흉측한 외모와 행동으로 모두를 두렵게 했다. 해리엇 자신은 그 아이를 부정하고 감당하기 어려워 사라져버리길 바라면서도 다른 이들의 눈에
그리 비치는 것이나 타인이 그런 뉘앙스의 말을 꺼내면 거세게 반박한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지... 벤은 결국 비정상아들이 모여있는 보호소로
보내지나 해리엇이 다시 데려오고, 그로 인해 가족은 점점 멀어지고 뿔뿔이 흩어진다.
그 후에도 해리엇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데이비드 역시 뭔가 느꼈어도 인정할 타입이 아니다. 일어난 문제에서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골칫거리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모든 일이 잘 돌아가는 듯 행동한다. 이 부부는 그들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감당하기 힘든 꿈을 꾸었고,
결국 무책임하게 행동했다. 그 둘은 따뜻하게 타오르는 벽난로 위에 걸린 그림같이 아름다운 가정을 꿈꾸었다. 그러나 현실 속의 가정에는 끊임없이
사람의 품이 들고 많은 돈이 필요한데다 빽빽거리며 보채는 아이와 돌보아야 할 부모가 존재한다. 그 와중에 감정을 나누고 대화를 이어가며 관계를
끌어가야 하는 것인데 그들에겐 그게 쉬워 보였나 보다.
책 속의 시간은 빨리 흘러간다. 여타 고전 문학에서 보이는 수많은 형용 어구들과 지난한 묘사들, 서술들, 속마음을 감추고 변두리만 두드리는
갈 곳 없는 대화들은 온데간데없다. 한 페이지도 아니고 한 줄, 두 줄이 지나는 순간에 해리엇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이토록 빠른 전개
속에서도 작가는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확실히 전한다. 이 박진감 넘치는 전개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구석 어색하거나 조잡한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스릴러 소설의 그것처럼 시종일관 긴장감 넘치며 흥미진진하다. 다만 어처구니없는 번역이 곳곳에서 짜증을 유발한다. 작품 자체는 소장하고
싶은데 이 책으로는 아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 곱게 번역해서 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