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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주목 ㅣ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3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독특한 작품이다. 소재나 에피소드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보다는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것, 사람이 자신의 감정과 본질을 인지하는 것, 사람이 타인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 되려나... 아, 이럴 땐 정말이지 부족한 말주변과 단어구사력이 부끄럽구나...
바라보는 법, 인지하는 법, 받아들이는 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과정이나 선택의 순간 등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닌 현상 그 자체를 바라보는 이야기라고 하고 싶다.
내가 나 자신이 벌인 일이나 선택한 것에 대해 스스로 정당성과 변명을 부여하고, 타인이 내뱉은 말과 저지른 행동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느끼는 바는 자신의 경험과 자의식, 감정, 생활방식 등이 반영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본인이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자신의 잣대로 세상을 보고 재고 결론을 내게 되어 있다. 물론 그것은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알게모르게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게되고 이 과정에서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는 게이브리얼이라는 인물과 이사벨라라는 인물이 나온다. 게이브리얼은 가식과 교만,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이지만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잘 아는 인물이다. 상황을 볼 줄 알고 상대를 관찰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 법을 알아 정치계에 입문하려 한다. 개인과 대중, 소문과 영향, 나설 때와 빠질 때를 잘 아는 그런 인물. 자신의 욕망에 너무 거리낌이 없어 결코 좋아할 수는 없지만 세상은 그의 예측대로 돌아가며 저 인간의 결말은 대체 어떠려나 싶은 그런 인물이다. 게이브리얼과 이사벨라는 완전히 반대 타입의 인간이다. 이사벨라는 타인의 시선이나 판단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스스로도 자신과 싸우지 않는다. 이게 나을지 저게 나을지 하는 선택은 그녀에게 없다. 그녀에게 모든 길은 하나이고 그것을 그냥 받아들일 뿐이다. 아무생각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 양자택일의 경우에 늘 모양 좋은 것만 선택해서 결과적으로 외길이 되는 것과는 다르다. 그녀에게 선택지란 것은 애초에 없었다. 그녀의 존재가 하나이듯 선택도 하나, 갈 길도 하나일 뿐이다.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민할 여지가 없는 것이고 고민할 여지가 없는 것은 외적인 것에 영향을 받거나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인은 나름 평온하고 행복할 지 모르겠으나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겐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게이브리얼에게 결코 마음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자가 외친 말들은 은근히 마음에 남는다.
[ "아니, 당신은 몰라. 당신은 고통이 뭔지, 진짜 고통이 뭔지 몰라. 난 그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알지 못했어. 대화다운 대화조차 하지 못했지. 노리스, 난 그 여자의 영혼을 깨부수기 위해 별짓을 다 했어, 온갖 짓을 다 했다고. 난 그 여자를 진흙탕으로, 쓰레기들 속으로 끌고 다녔지만 그 여자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랐던 게 분명해! '더럽혀지지도 겁먹지도 않는'…… 이사벨라가 딱 그래. 그건 섬뜩해. 섬뜩할 정도라고. 입씨름하고 울고불고 덤벼들고…… 난 늘 그런 장면을 상상했지. 그러면 내가 이기는 거라고! 난 이기지 못했네. 싸우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순 없는 거니까. 난 그 여자와 제대로 대화할 수조차 없었네, 단 한번도. 나는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에 취해봤고 약도 해봤고 다른 여자와 어울리기도 해봤어…… 하지만 이사벨라한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 그 여자는 그저 발을 얌전히 모으고 앉아 비단 천에 꽃을 수놓으며 가끔 노래나 흥얼대고…… 아직도 그 바닷가 그 성에 사는 것처럼…… 그 우라질 동화 속에…… 그 여자가 그것까지 여기로 끌고 와서……" - p. 310 ]
이사벨라같은 사람이 나와 그닥 가깝지 않은 관계라면 쟨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라며 넘어가겠지만 가족이나 연인, 부부의 문제라면 사뭇 다를 것이다.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이 안 되는 관계라면 그건 제대로 된 관계라고 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한쪽에서 아무리 이런저런 시도를 해봐도 저쪽에선 반응조차 없고 그게 뭔가를 위한 노력의 단서라는 것조차 모른다면... 상대방의 정신이 먼저 망가지지 않을까, 하긴 그 전에 떠나겠구나. 게이브리얼이 잘 했다는 것은 아니다. 절대 좋아할 수 없는 캐릭터이지만 이해는 된다는 말이다. 그가 이사벨라를 통해 얻고자 한 것, 이사벨라에게 품은 의도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뭐, 되도 않는 시도였다고 생각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