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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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부터 무거운 책을 올리려니... 나도 무겁다, 마음이.

유명한 전쟁사, 영웅담, 전투나 전술 이야기, 화려한 무기 등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전투의 꽃은 백병전이지,라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곤 했다. 가볍게 입에 올렸던, 재미있다고 망설임 없이 지껄였던 순간들이 부끄러운 기억으로 부메랑처럼 돌아옴을 느꼈다.

물론 모르지는 않았다. 노인들, 여자들, 아이들... 전쟁이 나면 전장 외에서도 언제나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 비단 총탄에 국한되지 않은 다른 이름의 고통들... 화염, 폭력, 약탈, 강간, 고문 등 힘없고 약한 이들이 당한 기록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위생병이나 간호사 외에도 다른 역할과 의무를 가지고 쏟아지는 총알 속에서 직접 전장을 누빈 여인들이, 소녀들이 있었다.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나면 희대의 독재자가 지닌 악의 무게는 더욱 크게 그려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몇몇 영웅들과 정치인들에게 비친 스포트라이트는 유독 화려하다. 그러나 이젠 어린 소녀들이, 많은 여인들이 그 자리에 함께 했음을 알게 되었다. 나라를 지키고, 가족을, 약한 이들을 지켜냈다는 명분에 어깨를 활짝 폈던 남자들이 감추고 싶었던 여자들의 전쟁이 책장을 펼치자마자 끝도 없이 쏟아져 내린다. 과거의 역사도, 미래의 역사도 갈 길을 잃은 이 나라에, 이 책을 읽고 가슴 치는 사람이 늘어나면 좋겠다.

사람의 말이 얼마나 우리를 진실에서 멀어지게 했던가. - p. 32

나도 그네들처럼 오랫동안 우리의 승리가 두 얼굴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하나는 아주 멋진 얼굴, 다른 하나는 무시무시한 얼굴. 하지만 둘 다 흉측한 상처투성이라 봐줄 수가 없다.

- p. 59

어쩌면 우리는 수시로 전쟁과 혁명을 치르느라 과거와 연대하며 혈통의 그물을 엮어가는 법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오래전 과거를 돌아보는 법도, 그 과거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는 법도. 우리는 서둘러 잊었고 서둘러 흔적들을 지워버렸다. 소중히 간직한 증언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유죄의 증거가 될 수도 있었기에. 할머니, 할아버지, 딱 거기까지만 알고 누구도 그 이상의 조상은 알지 못한다. 뿌리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역사는 만들어졌지만, 낮뿐인 삶이었으며 기억도 짧았다. - p. 192

30년이 지나서야…… 모임에 초대도 하고…… 처음에 우리는 과거를 숨기며 살았어. 훈장도 내놓지 못했지. 남자들은 자랑스럽게 내놓고 다녔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 남자들은 전쟁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 했지. 오나전히 다른 시선…… 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분하고 억울했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 p. 221

나는 그저 눈물만 흘려, 말은 못하고…… 나 스스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확신이 안 서는 걸 어떡해? 믿게 할 자신이 없는 걸…… 사람들은 그저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지. 고통스러운 이야기 따위는 들으려고 하지 않아…… - p. 437

피는 물이 아니야. 그래서 함부로 흘리면 안 돼지. 그런데 자꾸 피가 쏟아져. 하루도 피를 보지 않는 날이 없어…… 텔레비전에서…… - p. 463

바닥에 쓰러진 독일군 부상병이 고통에 못 이겨 두 손으로 땅바닥을 움켜쥐던 모습이 생각나. 그때 우리 병사가 그 독일군에게 그랬지. `손대지 마. 이건 우리 땅이라고! 네놈 땅은 네놈 나라에 있잖아, 여기서 꺼져…… ` - p. 489~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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