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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하는 삶 - 개정판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5월
평점 :
[나는 리브 크로퍼드에게서도 가게가 매물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아마 그녀는 서니 의료 기기가 마침내 망했다는 소식이 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 판단이 옳다. 하지만 그 가게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다. 또는 빌리지의 명물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앞으로도 누군가에게로, 그 사람에게서 또 누군가에게로 계속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품고 있었다. 품위 있는 사람이 시작해서 일으켜 세웠고 또 길러 냈던 자그마한 유물로서. 그 자리에 다른 가게, 예를 들어 서점이나 미용실이 생기면, 그 가게에 대한 기억은 금방 희미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괴롭다. '닥 하타'라는 이름 또한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 해도 타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횟수가 빠르게 줄어들고 결국 아무도 그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너무 늦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도 나 자신의 일부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베들리런에서 작은 봉사를 했다는 흔적. 훌륭한 묘석만 남기는 것으로 끝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완전히 닫혀 을씨년스러운 가게를 본 뒤에는 갑자기 운전대 앞에 앉은 내 실체가 없어진 느낌이다. 이 세상에 온 지 너무 오래된 유령같다는 느낌이다. - p. 267 ~ 268 ]
[서니 의료 기기도 지금처럼 속이 반쯤 빈 채 문을 닫는 대신, 활기로 인해 눈부신 곳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환상적인 상상이 펼쳐지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너무 복에 겨운 상상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무슨 명예나 부의 측면에서 복을 누리는 상상은 아니다. 그저 매일 밤 가게를 나오면서 슬쩍 돌아보았을 때, 그곳이 우리를 담아 줄 만한 그릇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상상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평생 동안 얻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어렸을 때 일본인 부부의 손을 잡고 정규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영광스러운 전쟁으로 일컬어지던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하기까지, 그리고 이 나라에, 그것도 매우 품위 있는 타운에 정착하기까지. 그것이 내 오랜 어리석음, 나의 연이어 온 실패는 아닐까? - p. 286 ]
[실제로 나는 마치 젊은이처럼 내 인생이 가능성과 선택을 향해 열려 있다는 느낌, 그만큼 취약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늘 내가 진실로 두려워하던 존재 상태였다. 사람들의 취약한 상태는 오랫동안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물론 나는 전쟁 중에 임무를 수행하면서 죽음과 연약함을 목격할 때마다 경악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쟁을 맞아 무딜대로 무디어진 남자들의 의지는 어떤 종속적 상태를 피해 가지 못했다. 들을 귀와 볼 눈만 있으면 무력하게 빠져 들고 마는 그 비인간적인 행위들. - p. 306 ]
[내가 바란 것은 큰 집단을 이루는 것의 한 부분(비록 백만분의 일이라 해도)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척'뿐인 삶 이상의 어떤 것을 가지고 그 과정을 마치는 것이었다. 지금은 똑똑히 보이지만, 사실 나는 그 상황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K와 다른 여자들도, 병사들과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무시무시한 것은 우리가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전쟁 기계에 우리 자신을, 또 서로를 먹이로 내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 p. 414 ]
[그러나 나는 이제껏 일어났고 또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충격적인 일들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도 묘하게 때를 맞추어 행복의 물결이 밀려온다는 것을 또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토머스의 손에 이끌려 작은 쇼핑몰을 지나갈 때, 서니가 그 애의 머리 위로 티셔츠를 입히는 순간 그 애가 반은 공포에 젖고 반은 기쁨에 젖어 꿈틀거리는 모습을 지켜볼 때, 그런 단순한 것에서 오는 작고 순수한 기쁨을 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나를 들뜨게 하는 것은 이런 것만이 아니다. 이런 기쁨에 자연히 따르게 마련인, 가족의 지속에 대한 희망, 예측할 수 없이 풍부하게 진화해 가는 존재에 대한 희망이 있다. 이런 종류의 복잡한 관계가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 내가 실제로 여기에, 또는 저기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줄까? 그 나머지에 대한 결코 알려지지 않을 연대기 외에 달리 무엇이 나를 표시해 줄까? - p. 4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