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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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특징은 격정적이고 혼란스러운 배경과 상황을 그리면서도 차분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는 점이다. 분명 국가와 조직, 사회의 억압이나 횡포, 각종 폭력에의 노출, 응어리진 울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가로운 오후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서 차 한잔을 마시는 듯한 평온하기까지 한 분위기가 풍긴다는 점이다. 그 묘한 간극이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내가 책을 제대로 읽고 있나 싶어 앞 페이지를 다시 넘겨보게 만들기도 한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영국에서 자라난 작가의 개성이 반영된 것일까? 책 어디에서도 폭발하는 듯한 감정의 분출이나 흔들리는 인물의 내면이 크게 조명되지 않는다.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단어를 고르고 어조를 신경써가며 말하는 듯하는 모양새가 느껴지고 심지어 총격전이 벌어지는 한복판에서조차 침착하고 매너있는(?) 대화를 주고 받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뱅크스, 세라, 제니퍼가 삶을 살아가고 미래를 바라보는 방식은 다소 특이하다. 셋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부재를 늘 의식하며 자랐고 그 시절의 기억을 그리워하며 살아왔기에, 미처 덜 자란 어른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그럴지도 모른다. 유년시절은 늘 찬란했고 아름다웠으며 어른이 되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기특한(?) 바램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에겐 잔인하고 무모하고 비정한 사회가 아직 그들이 끼어들지 않은 미완의 것으로 보이기에 그런 특이한 자세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이 작품은 일종의 성장소설이 아닐까. 성장이라는 것이 사회적 시스템에 인정을 받는 어른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그제보다 어제가,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의미라면 말이다. 온전한 가정에서 자라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가는 일반적인 루트를 거치지 못한 뱅크스, 세라, 제니퍼는 서로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가까워지게 되며 비슷한 인생길을 걸어가게 된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해 뭔가 늘 부족함을 느꼈기에 그 속에 끼어들기 위해, 소속감을 갖기 위해 사회에 뭔가 더 기여하려고 애쓰는 삶, 그러나 결코 온전한 관계를 갖지도 못하고 확신도 얻지 못한다. 그렇지만 불행하거나 좌절하지도 않는다. 아직 채워나갈 것이, 바꿔나갈 것이, 변화할 여지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노골적으로 뭔가를 전하려고 하지 않기에 그의 작품은 호불호가 갈릴 듯 싶다. 싫다 좋다의 문제라기 보다 가까이 하기엔 뭔가 조금 불편한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한데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는 편은 아니다. 보통 여운이라는 것은 결말에 느끼는 감정인데, 이 작가의 작품은 전체가 여운을 남긴다. 괜시리 문장을 곱씹게 되고, 등장인물의 기억을 같이 더듬게 되는 잔잔한 중독성이 가득하다. 차근차근 그의 작품 모두를 읽어보고 싶다.


["그립다라. 그림다는 건 좋은 일이야. 아주 중요한 일이지."

 "정말 그럴까, 친구?"

 "중요한 일이야. 아주 중요해. 그리워한다는 것 말이야. 그리워하면 기억하게 되거든. 우리가 어른이 되면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걸 말이야. 우리는 그 기억을 가지고 좋은 세상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거지. 아주 중요하지...(중략)   - p. 370-371 ]


["네게는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달 그 여행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하던 중에 내가 제니퍼에게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 말을 들은 다음에야 나는 깨달았지. 내 말은, 어머니가 나는 줄곧 사랑하셨다는 거야. 그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말이야. 그녀가 원했던 것은 단 하나, 내가 좋은 삶을 누리는 거였어. 그 나머지 모든 것, 내가 어머니를 찾으려 노력했든, 이 세상을 파멸로부터 구하려 노력했든 어느 쪽이든 어머니께는 아무 차이가 없었던 거야. 나에 대한 어머니의 감정은 언제나 그저 거기 있는 것으로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어. 그건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나로서는 그 사실을 깨닫는 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렸어."   - p. 430-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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