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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자 ㅣ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산다는 말은 언뜻 보면 무척 매혹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없는 어린 시절, 가족과 보호자의 비호 아래 살던 시기의 과거로 인해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된 이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일이 아닐까. 20살이 넘어 본인 스스로가 모든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시기에 생긴 문제는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다. 그러나 힘이 없던, 아무 것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던 시절에 다른 사람으로 인해 망가진 인생은 어찌 살아가야 하는지.
읽다보니 미미여사의 [화차]가 떠올랐다. 끔찍한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 인생을 살고 싶었던 여자의 이야기. 다만, 책의 두께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환상의 여자]속의 사건과 음모는 좀 더 많은 사람과 복잡한 관계들이 얽혀 있다. 안타깝게도 그 사람을 만드는 것은 지금껏 살아온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 책 속에서도 나오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은 쉽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거래처 직원, 옆집 사람, 동네 카페 알바, 집 근처 마트 주인 등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기에 그 사람이 누구인지 증명해 줄 사람은 사방에 깔려 있는 것이다. 사회와 단절되고 집 안 방구석에 틀어박혀 산다고 해도 그 수가 줄어들 뿐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어 살아온 여자, 오랜 시간 사랑했던 여자, 그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해야 하나... 심지어 그 여자가 죽었다. 내 물음에 답해줄 사람이 더 이상 현실에 없다면... 원망해야하나, 속았다고 분해해야 맞는걸까.
기억도 나지 않는 족보를 따져가며 조상을 찾고, 부모의 직업이 뭔지, 형제자매가 결혼은 했는지 꼬치꼬치 실례인 줄도 모르고 물어오는 한국인들 속에서 살아가다보면 살아온 인생의 무게와 나를 둘러싼 사람과 관계의 무거움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한번 찍힌 꼬리표가 평생을 따라다니는 나라에서 지금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고 소리쳐봐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환상의 여자] 속의 료코도, [화차]의 쇼코도, 분명 나쁜 일을 저지른 것은 확실하지만 편들어주고 싶은 마음 역시 존재한다.
가노 료이치는 유독 작품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사건과 인물이 이리저리 얽혀 엄청 복잡해 보이는데 좀더 간단히 풀어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주인공 변호사 양반이 죽도록 고생해가며 알아내려 하지만 결국 진실에 다가가지는 못하고(그래도 진실 끄트머리까지는 간다) 결국 결말에 이르러 누군가가(스포일러 방지) 설명해줘서 다 밝혀져 버리니 허무하기도 하고 말이다. 너무 과하게 끌고간 느낌이 없진 않은데, 작가가 내내 무겁게 잡아놓은 분위기 탓에 료코가 짊어진 무게와 아픔이 다 그럴만하게 보이게 되어서 그럭저럭 마무리 된 듯 하다. 주말 오후를 통으로 이 책에 바쳤더니 손목이 시큰거린다. 688페이지 정도되는 책을 보려면 적어도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앉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