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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
오다 마사쿠니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책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쓴 판타지소설이다. 그야말로 자다깨나 책을 펼쳐 읽으며 집안 곳곳을 책의 탑으로 가득 채우고 지(知)에 대한 욕구가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람, 살아서나 죽어서나 책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하는 강렬한 욕망이 탄생시킨 환상소설이다. 아마 애서가라면 증식하는 책더미에 본인도, 함께 사는 가족들도 불편한 기억이 있지 않을까. 이 부분에서 작가는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찾아냈다. 책은 사는 것이 아니라 늘어나는 것이라고. 아마 그 발상이 이 책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오다 마사쿠니는 책과 사람의 인생을 함께 연결시킨다. 사람은 누구나 한 권의 책으로, 죽으면 다시 책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 책은 <생명의 서>라고 해서 한 사람의 일대기가 모두 그려져 있다고 한다. 책과 책이 배맞아 낳은 환상의 책 "우자니"에 장서인을 찍어 모으면 책 주인이 죽을 때 그것들이 다리 여섯 개에 날개가 달린 흰코끼리로 변해 책 주인을 태운 뒤 보르네오섬에 있다는 <라디나헤라 환상 도서관>으로 데려가 책 옆에서 영원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책 집착인스러운 발상인지.
텍스트로 요약해놓으니 황당무게하기 그지 없지만 책을 찬찬히 읽다보면 작가의 장난기 가득하고 유머러스한 문장에 절로 흐뭇한 웃음이 나면서 쉽게 빠져들 수 밖에 도리가 없다. 일본인이 아닌지라 한자어로 한 농담이나 그들의 배경 문화를 알아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재미있었고 실컷 즐길 수 있었다. 간만에 기분좋게 유쾌한 책 한권을 알고 간다.
[너도 언젠가 이 쾌락을 알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만, 절판된 희귀본을 소유하는 것은 소심하고 범용한 인간에게도 가능한 작은 악덕이며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 p.77 ]
[아, 그리고 답장은 절대 쓰지 마십시오. 다음에 만날 때 직접 여쭙겠습니다. 실은 잠이 영 오지 않아서 그런 때면 글을 쓰곤 하기 때문에 심심풀이로 펜을 든 것뿐입니다. 밤에 편지를 쓰면 안 된다고들 하는데, 왜그런지 아침엔 쓸 생각이 안 납니다. 햇빛 아래 흥이 나지 않는다고 할지, 너른 세상이 술렁거리는 게 느껴져 조그만 종이를 노려보고 있는 게 바보 같아진다고 할지, 하지만 밤이 되면 세계가 조용히 작아져 제 주위로 모여들고 저를 제 안에 가두어 생각을 한다든지 글을 쓰게 합니다.
물론 밤에 썼을 경우, 아침에 다시 읽어보면 안 됩니다. 눈 뜨고 볼 게 아닌 것 같아서 결국 찢어버리니까요. 하지만 밤에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 p.163 ]
[나는 여태 전모를 알지 못하는 거대한 어떤 것을 획득하고, 그 대신 지금껏 인간으로서 뻗어온 뿌리를 상실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이미 인간이라 할 수 없다. 그저 어릿광대다. 인간의 생이란 종국에 가서는 죽음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 p. 3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