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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의 황야 - 하 ㅣ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7월
평점 :
책설명이나 홍보문구, 출판사 이름 등을 굳이 따져보지 않고 구매하게 되는 작가 중 한명이다. 그가 그려낸 작품들의 배경이 대개 몇십년
전이고 실제 그가 집필한 시기도 그에 맞먹지만, 그의 이야기는 시간의 속성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장점이 있다. 기본적인 인간의 정서를 건드리고
납득가능한 시대적 분위기를 곁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현시대의 잣대와 기준으로 세상을 평가하고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과거의 사건과 인물을 그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는 것부터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탁월한 재능이라 생각한다.
오래된 사찰을 둘러보는 세쓰코는 방명록에서 돌아가신 외삼촌의 필적과 같은 서명을 발견한다. 외삼촌이 좋아하던 근처의 다른 사찰에서도 같은
글씨체의 서명이 발견되지만 외삼촌, 노가미 겐이치로의 가족들은 우연이라며 웃어넘기고 만다. 다만, 노가미 겐이치로의 딸 구미코의 연인 소에다만
뭔가 모를 예감에 노가미의 마지막을 아는 사람들에 대해 알아보게 된다.
전체적으로 액션 스펙터클한 장면이 줄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상권 초반 몇장에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노가미가 살아있군) 대번 짐작이
가게끔 쓰여졌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 왜 죽은 걸로 처리되어야 하는지, 이 사실이 어찌 밝혀질지, 누구에게 전해질지 등이 작품의 주요
골자다. 독자도 그 사실을 알면서 읽게 되지만 전혀 재미가 반감되지는 않는다. 이것 역시 작가의 능력이겠지만.
노가미가 전쟁 막바지에 정확히 무슨 일을 했었고 그것이 일본의 종전 선언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의 죽음을 발표한 자들과 그의 생존을
의심하며 뒤를 쫓는 자들의 관계에 대해서 자세히 그려냈다면 그 어떤 첩보 스릴러보다 흥미진진했을 것이고 작품의 제목부터 작가에 대한 평까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사실 상권을 읽는 동안에는 이쪽 스타일의 이야기를 기대했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충분히 그런 작품을 쓸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작가임에도 다른 스타일로 이 작품을 마무리 지었다. 아마 작가는 국가, 전쟁, 이해관계, 국민정서, 역사의 평가 등 거창하고
추상적인 개념과 이미지의 이야기보다 그 시대를 살아가고 그 안에서 선택하고 희생당하고 잊혀져가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라 생각한다. 해설에
나온 것처럼 이 이야기는 미스터리의 요소도 부족하고 그런 재미도 확실히 부족하다. 하지만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었기에 그렇게
여러번 드라마화 된 것이 아닐까. 흔하디 흔한 결말이고 뻔한 최루성 장면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공감하는 방식으로 마무리 된 것도
그런 의도가 들어가 있다고 본다.
인물들의 따스함과 다정한 마음들이 페이지마다 뚝뚝 묻어나는 작품이다. 이토 다다스케처럼 작품의 전반적 정서를 해치는 캐릭터 관련 사건은
최소한만 보여줌으로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유지해 나간다. 자신의 의혹과 믿음을 토대로 노가미의 주변을 추적하는 소에다 역시, 뭔가를 밝혀내려는
집요함과 치밀함보다 장인이 될 수도 있는 분의 안타까운 사정과 연인의 가족에게 아버지를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이 곳곳에 드러난다. 자극적이지 않은
잔잔한 가족드라마를 보는 기분에 적당한 호기심이 가미되어 끝맛 개운한 음식을 먹은 듯 하다.
[ "그게 살아 있는 인간의 번뇌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거야. 누군가가 나를 알아두기를 바라는 걸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건
역시 쓸쓸하다. ……이런 번뇌 말일세. 그래서 그럴 만한 사람을 찾아보니 역시 자네밖에 없더군." - p. 134 ]
[ "노가미 씨에게는 파리나 사막이나 마찬가지요. 지구상 어디에 가더라도 그에게는 황야밖에 없거든. 결국 국적을 잃은 사람이니 말이오.
아니, 국적만이 아니오. 자신의 생명도 십칠 년 전에 잃은 남자요. 그에게는 지구 자체가 황야요." - p. 2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