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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볼 ㅣ 밀리언셀러 클럽 106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남희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2월
평점 :
기리노 나쓰오의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도쿄 섬]
이후 좀 달라졌다. 기리노 나쓰오는 인간의 어둡고 비뚤어진 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독자를 불편하게 할 정도로 사람, 여성에 대한 관찰과
표현력이 뛰어난 작가이다. 그런데 [도쿄 섬]도 그렇고 [부드러운 볼]에서도 그녀의 스타일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본인의 스타일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그런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 같긴 한데 딱 거기까지다.
주인공 카스미는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홀로서는 게
목표란다. 그런 각오와 삶을 대하는 태도가 그녀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 이시야마를 넘어오게 했다지만 독자가 보기에 설득력이 없다. 그녀의 목표와
고향을 버리고 떠나왔다는 과거가 그녀의 캐릭터 형성에 별 영향을 주지 못 한 듯 보인다. 도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도망치듯 고향을 등진
카스미는 일상에 지치고 찌든 여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유카가 사라진 뒤 몇 년이 지나도록 딸을 찾아헤매는 엄마로서의 모습은 안타깝지만
새롭게 집착할 거리를 발견하고 매달리는 듯한 모습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위암 말기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전직 형사 우쓰미가
그녀를 도우려는 의도 역시 전혀 설득력이 없다. 게다가 우쓰미가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척은 전혀 없다. 아니, 사건을 재조사하는 게
아니라 카스미가 아이 찾기를 정식으로 단념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사건 장소를 둘러보고 관계자들을 만나고 다님으로써 이제 그만~ 이라고 선언하는
과정을 옆에서 단지 지켜볼 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쓰미는 병세가 악화되어
혼수상태에서 꿈을 꾸게 된다. 꿈 속에서 용의자 혹은 사건 관계자 중 한 사람이 되어 범행을 저지르는 과정을 그대로 보게 되는 꿈이다. 카스미
역시 같은 방식으로 꿈을 꾼다. 페이지가 몇 장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이 꾸는 꿈은 범인의 범위를 좁혀주는 설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고 끝난다. 역자 후기에 보니 작가는 초고에서 범인을 밝혔는데 편집자가 만류하여 범인 공개 부분은 삭제되었다고 한다.
이건 열린 결말도 뭣도 아니다. 뭐 진척이 된 게 있어야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이지 단서도 목격자도 증언도 없이 책 말미에서
주인공이 꾸는 꿈 몇 편을 보여준 것으로 끝을 내는 것은 무슨 경우인지. 작가의 초고처럼 범인이 밝혀지는 부분이 삭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문제다.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놓고 마지막에 범인은 누구다라고만 하면 이게 다큐멘터리지 미스터리 추리물이냔 말이다. 손목 아픈데 애써 들고
본 시간이 아깝다. 두 번 연속 나를 물 먹였으니 기리노 나쓰오를 멀리 하고 싶은데, 삼세번이라고 한번 더 기회를 줘야 하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이 기분, 어쩐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