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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9-3 ㅣ 아서 왕 연대기 3
버나드 콘웰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날카로운 검도 결국엔 녹이 슬고, 위대한 인물도 시간이 흐르면 죽는다. 화려한 시대도 아름다운 이야기도 꿈만 같은 전설도 모두 과거라는
시간 속으로 사라져간다. 마지막 권을 읽기 시작한 순간 끝이 머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다 읽고 난 지금 왠지 모를 허무함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이교도임을 자처하고 항상 미트라스 전사로 살아가는 게 자랑스러웠던 데르벨이 어쩌다 한 손이 잘리고 기독교도가 되고 산쉼 주교 밑에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마침내 3권에서 밝혀진다. 니무에와 데르벨이 어린 시절에 맺은 서약의 증표인 손바닥 상처가 의미하는 것도 알게 되었고 멀린의 최후
역시 확인할 수 있다. 귀니비어의 이야기와 아서의 마지막 모습도 자연스럽게 잘 그려졌다. 무수한 신화와 전설로 남은 아서왕의 이미지와 명성에
걸맞게 또 독자들의 희망에도 어긋나지 않는 퇴장이었다.
" 도대체 전쟁은 언제나 끝나는 걸까? 평생을 브리튼에 살면서 색슨족들과 싸웠고 그래서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전이 끝나고
몇 년이 채 되기도 전에 우린 더 많은 땅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그 땅과 더불어 계곡과 언덕에 넘쳐흐르던 이야기들도 잃었다. 역사는 사람들이
만드는 얘기이자 대지가 품은 이야기다. 우리는 그곳에서 죽은 영웅의 이름을 따다 언덕의 이름을 붙이고, 제방 옆으로 피신한 왕자의 이름으로 강을
부른다. 따라서 옛 이름이 사라지면 그들과 함께 이야기도 떠나고 마는 것이다. 새 이름에서는 과거의 향기를 맡을 수 없다. 사이스는 우리 땅과
더불어 우리의 역사도 빼앗아간다. " -p185
어린 시절 읽던 동화를 어른이 되어 완역본으로 읽는 기분은 참으로 묘하다.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들춰보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내가
모르던 세계를 엿보는 듯 하고 몇몇 사람들만 알던 비밀을 내가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쾌감이랄까... 그래서인지, 마침내 확인하게 된 것이
비록 꿈과 희망, 사랑과 정의가 가득한 핑크빛의 세상이 아니라 배신과 음모가 난무하고 아픔과 상실의 고통이 가득하며 악한 이가 처벌받고 선한
이가 보상을 받는 그런 행복한 결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서왕 이야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좋은
기억과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너무 산산히 부서진 탓에 이 책들을 오래 가지고 있진 못하겠다. 비교하는 차원에서 [아발론 연대기]를 곧 읽을
계획이었으나, 한 1년쯤 뒤로 미뤄야겠다. 왜 많은 이야기들이 동화 버전과 완역 버전으로 따로 출판되는 지 알 듯 하다. 어린 시절에 완역본을
읽게 된다면 끔찍한 현실에 겁을 먹고 어디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말라버린 감성을 지닌 채 어른이 되는 것이
마냥 끔찍하지 않을까? 혹시 동화 버전을 읽고 나서 완역본을 읽게 되면 속았다고 분통을 터뜨리려나? 뭐가 더 나은지는 잘 모르겠다만 개인적으로는
동화 버전의 내용과 이미지를 좀 더 오래 간직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