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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의 몸값 ㅣ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7월
평점 :
사건의 발단이 된 범죄의 형태가 무척 흥미로웠다. 유괴를 하긴 했는데 부잣집 외동 아들이 아니라 그 집 운전기사의 아들이다. 부잣집 아들과 한 집에 살며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는 아들... 멍청한 유괴범은 아이가 바뀐 지 안 뒤에도 부잣집 주인인 더글라스 킹에게 몸값을 요구한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뼈빠지게 일해 온 더글라스 킹은 마침내 사업체의 주인이 될 기회를 잡고 그를 위한 돈이 손 안에 있는 상태이다. 평생 꿈꿔왔던 회사의 주인이 될 것인지 아니면 아들의 친구이자 고용인의 아들의 목숨을 구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오호~ 무척 참신한 시도라고 생각했다. 범죄소설이나 스릴러 작품들이 사건보다 인간에게 초점을 돌릴 경우 그 대상은 범인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범인의 지난날에 관한 에피소드를 보여주며 그 놈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살짝 설명한다. 범인이 저지른 일은 끔찍하지만 그로인해 빠질 수 있는 "범인=악"의 공식에서 탈피하여 범인도 인간이었음을 과하지 않은 선에서 보여주려 한다. 독자는 동정까지는 아닐지언정 그래서 이렇게 되었군 하고 납득하는 수준까지는 공감을 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분명 유괴라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들이 있는데, 평생 숙원이었던 사업체의 우두머리가 될 것인지 아니면 남의 아이의 목숨을 구할 것인지 하는 결정을 두고 갈등하는 더글라스 킹이 제일 나쁜 놈이 된 것 같다.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들의 태도도 애매하다. '유괴' 그 자체는 모든 범죄들 중 가장 지독하다는 평가를 내리면서 왠지 유괴범 보다 몸값 지불에 관한 결정을 유보하는 킹에게 더 멸시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더글라스 킹이 대대로 내려온 유산의 후계자이거나 돈 많은 부인의 힘으로 일어난 사업가라면 어땠을까? 킹은 과거의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죽자고 노력해서 지금의 자리에 오른 남자다. 물론 현재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올바른 정도의 길만 걸은 것은 아니다만 살벌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 하나 없이 맨몸으로 그자리까지 가는 길이 순탄하리라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킹의 망설임은 이해가 가고 납득이 간단 말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납치된 줄 알았던 초반엔 기꺼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아니다. 운전기사 레이놀즈의 아들이다. 킹은 말한다. 레이놀즈는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고, 내 반만큼도 열의가 없었다고, 그래서 지금 자신의 아들을 구할 돈이 없는 거라고.
[아래부터는 스포일러 있습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구로사와 감독의 [천국과 지옥]은 이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본 적은 없지만 무척 잘 만들어진 영화라 한다. 형사들이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잘 꾸며진 저택의 응접실을 '천국'으로, 유괴범들이 모여있는 어두컴컴하고 사회에서 외면당한 것 같은 공간이 '지옥'으로 묘사된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어느 곳이 천국이고 지옥인지 모르겠다. 이건 단순히 사람의 욕망이냐 인간의 도리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더글라스 킹의 망설임과 결정을 경멸한다며 떠나겠다고 짐 쌌던 부인 다이앤은 킹이 결국 회사의 주인이 되자 아내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 킹은 몸값은 내지 않았지만 칼을 손에 든 유괴범과 몸싸움을 벌인다. 유괴된 아이 제프는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유괴범의 편을 든다. 도대체 누가 진짜 악당인가...
책 말미에 있는 "역자의 말"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역자가 말하듯이 작가에 정통하거나 개인적 감상을 적는 번역가와는 좀 다른 스타일의 글을 남겨두었고, 이는 작품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가 되기에 충분했다. 다른 작품으로 또 만나게 되기를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