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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ㅣ 샘터 외국소설선 4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샘터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19세기 말 뉴욕, 돈벌이를 위해 사교계 부유층 인사들의 거짓된 초상화를 그리며
예술과 현실의 중간쯤에서 미적거리며 살아가고 있던 피암보는 거액의 보수를 지불하겠다는 묘한 초상화 의뢰를 받게 된다.
이 일을 기회로 진정한 화가로서 다시 살아가고자 결심한 피암보는 의뢰인을 찾아가게 된다.
초상화를 부탁한 이는 자신을 샤르부크 부인이라 칭한 여인이었고
병풍 뒤에 숨어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초상화를 완성하라고 한다.
거액의 보수에 대한 대가는 실로 터무니없는 요구였으나, 화가로서의 도전의식과 보수에 대한 욕심에 피암보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결심한다.
그에겐 오랜 세월 다정한 조력자 역할을 해온 사만다라는 애인이 있었고
그의 자질을 발견하고 키워준 위대한 화가 사보트라는 스승도 있었다.
또한 늘상 아편에 취해있긴 하지만 그에게 항상 진실한 벗이자 조력자가 되어준 셴즈도 있다.
피암보는 그들의 도움을 얻어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화를 완성하기 위해
낮에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밤에는 그녀의 이야기를 토대로 과거를 추적한다.
그러던 중 눈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여인들의 시체가 발견되기 시작하고
느닷없이 샤르부크 부인의 남편이란 자가 나타나 피암보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환상소설이란 장르의 요건을 충분히 충족하고 있다.
19세기 말의 뉴욕, 아름다운 대가들의 미술품, 절대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만을 통해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 연극계의 아름답고 다정한 프리마돈나, 샤르부크 부인이 들려주는 믿기 힘든 이야기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는 다른 요소들 역시 작품 곳곳에 산재해 있다.
셴즈가 그녀의 과거를 뒤쫓는 과정과 피 흘리며 죽어가는 여인들, 갑자기 등장한 샤르부크의 협박 등이
단순히 몽환적이고 현실적이지 못하게만 느껴지는 책의 줄거리를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다.
아마도 이런 요소들과 장면들이 그럴듯하게 그려지지 않았다면
이 책은 단지 샤르부크 부인과 피암보가 빚어내는 심리게임소설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
시대적 배경을 잘 살리고 실재했던 예술가와 작품들을 적절히 버무려 넣음으로써
마냥 판타지스런 분위기로 흘러갈 수 있는 글의 분위기에 적절한 제동장치 역할까지 하게 하고
동시에 독자 역시 더이상 꾸며낸 듯한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작품에 몰입하게 되며 상상으로나마 샤르부크 부인의 얼굴을 떠올려 보게 만든다.
반전이면 반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의 결론은
환상소설임에도 나름 분명한 결말을 보여주고 있어 읽고 난 후에 개운함까지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다.
진정한 화가라면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대상의 내면까지 읽어내어 화폭에 옮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가을 빛에 노랗고 빨갛게 변해가는 나뭇잎은 본디 그런 색이 아니라
기나긴 봄과 여름을 잘 버텨왔음이며
여인의 눈과 입가에 난 주름은 단지 나이를 반추함이 아닌
그녀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흔적일 것이다.
스승 사보트가 믿었듯이 피암보에겐 그런 재능이 있었고
마침내 그에게 그 능력을 시험할 기회가 왔던 것이다.
예술가에게 어려운 과제를 내어 상상력을 바닥내고 재능을 사장시킴으로써
미치광이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는 종종 접할 수 있었지만
이 책은 마치 그 완결판인 듯한 기분마저 든다.
샤르부크 부인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 이야기와 그녀가 피암보와 나누는 이야기,
피암보와 사만다의 이야기, 셴즈와 그녀의 과거를 조사하는 이야기,
눈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여인들의 이야기, 샤르부크의 등장과 협박,
화려한 미술품들 이야기, 고대에서 알게된 비밀의 약에 관한 이야기까지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쟈드가 들려주는 천일야화처럼
재미나고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이야기가 쉴 새 없이 몰아친다.
매혹적인 그림의 표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지루한 순간은 전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