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육에 이르는 병

살육에 이르는 병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주위에서 이런저런 얘기가 많이 들려왔던 책이다.
결말의 충격적인 반전이나, 살인의 잔인성, 범인의 잔혹하고 변태적인 성적 취향 등...
사방에 스포일러가 산재한 책이다보니 귀에 안 들어올래야 안 들어올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결말을 알고 보더라도 흥미있는 내용은 무척 재미나게 보며
맘에 들면 10번이고 20번이고 처음과 같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내게
아무리 막강한 스포일러라 하더라도 그닥 효과가 크진 않은 편이다.
재미있는 작품에 몰입해서 보긴 하지만 내 의지가 배제된 채 작가의 의도를 쫓아가는 편이라
반전을 예상한다던지 범인을 맞춘다던지 하는 일도 별로 없어서 더 그럴 수도 있다.
작품을 읽다가 이거 이렇게 되는 거 아닌가...이놈이 범인이겠구만...류의 잡생각(?)이 드는 경우는
그 책이 몰입도가 조금 떨어지고 치밀하게 전개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서 든 생각이지만 아마도 몰랐더라면 작가의 의도대로
범인을 예상하지 못 했으리라 여겨진다.
 

이 책에서 작가는 묘한 트릭을 사용한다.
대부분의 추리, 범죄, 미스테리의 경우 사건 자체에 트릭이 있어서
범인을 잡는데 애를 먹으며 그로 인해 추적과 조사의 과정에서 밝혀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독자로 하여금 재미를 느끼고 빠져들게 하며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작가는 독자에게 트릭을 사용한다.
세사람의 교차된 시점을 번갈아 가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
그 자체에서 이미 트릭은 시작된 것이다.
 

이런 본격 장르 소설의 경우
범죄의 질이 잔인하고 강도가 높으며
범인이 과거에 어떤 사건으로 인한 충격으로 현재의 삶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거나
추리와 수사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관련 캐릭터들이 독특할 수록 작품의 재미는 더해지는 법이다.
[살육에 이르는 병]의 경우 이런 요건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하겠다.
여자를 목 졸라 살인한 뒤 시간을 즐기고 주요 부위를 도려내며 그 일련의 과정들을 촬영까지 하는
미노루의 범행은 더할 나위 없이 충분히 자극적이다. 
또 그 범행의 모티브가 된 것이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거부당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책의 후반부에 짤막하게 등장한다.
집안에 관심없는 남편과 성장하여 가족보단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아이들 때문에
가정이 무너진다고 여기며, 화목한 집안을 유지하기 위해 혼자 애쓴다고 하는 마사코...
가정에 대한 그녀의 묘한 집착은 아들이 마스터베이션한 흔적을 찾기 위해 정기적으로
휴지통을 뒤질 정도에 이른다.
어린 시절부터 언니 것에 눈독을 들이고 탐을 내어 빼앗으며 마침내 언니의 가정까지 깨뜨린
희생자의 여동생과 함께 범인을 추구하는 홀아비가 된 형사...
어딘가 문제가 있고 자신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인정하며
그로 인해 약간씩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사건은 사건대로, 인물은 인물대로, 과거는 과거대로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다.
재미의 요소는 충분히 갖추고 있으되, 과장과 오바의 영향이 어느정도 보인다.
물론 작가는 일본인이며 그 나라의 환경에선 충분히 가능한 설정들이다.
시간을 즐기는 취향이나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비뚤어진 애정이나
남편의 냉대에 자식에게 집착하며 속을 썩어들어가도 겉모습만 멀쩡한 가족을 지키려는 어머니
자매의 비뚤어진 형제애... 퇴직하고, 아내마저 죽고 혼자 남은 생기 잃은 초로의 남자 등은
일본 사회에서 낯선 캐릭터들이 아니며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들도 아니다.
다만 그 모든 것들을 그 짧은 이야기에 끌어 모어 집대성한 것이 조금 억지스럽지 않나 싶다.
 

이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워낙 분명히 갈리고
내게 이 책을 건네 준 지인도 너무 혹평을 해서 신경이 쓰였었는데
되려 난 중간적인 입장이 되어 버렸다.
재미로만 따지면 부족하지 않다.
다만 잘 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