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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애무
에릭 포토리노 지음, 이상해 옮김 / 아르테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주인공은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성장했다.
부모님이라는 존재의 나머지 한쪽인 어머니조차 그를 사랑하며 보듬는 분이 아니었다.
그는 사회의 기본 단위라 하는 가족 속에서 애정이나 관심보다는 결핍과 고독을 배웠다.
처음부터 아버지, 어머니의 존재를 마음으로 느끼지 못 했기에
그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조차 제대로 갖지를 못 했다.
지배받고 있던 것, 소유하고 있던 것, 존재하고 있던 것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당황하고 슬퍼하며 추억하지만
애초에 잃을 것이 없었던 그에게는 갖지 못 했던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아쉬움, 미련이 아닌
특정 부분에 관한 "무지"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갖게 된다.
아니, 그 전에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아이의 어머니였으며 그로 하여금 아버지란 낯선 이름의 존재가 되게 했다.
다만 그녀는 그에게 아이를 남기고 떠났다. 불안해 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될 만한 남자라 하면서...
당황한 남자는 어머니의 부재를 아이가 느끼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쓴다.
자신의 생부조차 알지 못 했기에 아버지란 이미지와 역할에 자신이 없었던 그는
아이를 사랑받고자 하는 작은 인격체로 동등하게 취급한다.
아이의 요구와 부탁을 무조건적으로 들어주려 노력하지만
그 수고와 노력이 통하지 않는 순간엔 폭발한다.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그에겐 차라리 어머니의 역할이 어울렸을 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냉담했던 어머니를 바라보며 꿈꾸던 것...
자신의 아이를 나은 여성이 가진 이미지, 향기를 형상화하여
그 속에 불안한 아버지로서의 자신을 감춘다.
아마도 마지막 페이지의 반전(이미 눈치챘다만...)은
자신을 감출 수 있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알아버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무책임하게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어머니의 자릴 차지한 여자보다도
자신이 갖지 못했던 것을 아이에게 주려했던 어머니의 외관을 한 아버지의 의도를 알아주지 못한,
그 내민 손을 잡아주지 않은 아이에 대한 원망일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생면부지의 아버지와 늘 차가웠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자신이 아이에게 베푸는 관심과 애정으로 대체하려고 했었던 무의식적인 의지가
산산히 부서져 내린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는 끊임없이 혼란스러웠다.
아이의 유치원 선생님이 말하듯이...그런 아버지는 없다,
아이를 달래고 얼르고 눈 맞추는 아버지는 되려 아이를 잘못 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아버지란 존재는 늘 뒷모습을 보이며 칭얼대는 아이에게 강한 으름장을 놓을 수 있는 존재란 것이다.
이는 전세계 공통적인 아버지의 모습인 듯 하다.
어머니에겐 따스한 애정과 관심을 바라고 아버지에겐 근엄하고 표정없는 얼굴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왜 그는 스스로가 아이에게 느끼는 사랑스러움만으로 자신할 수 없었을까...
끊임없이 아버지의 존재를 몰라 어찌 행동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자신이 어머니에게 정신적으로 버림받았 듯 아이의 엄마가 떠난 것을 신경써야 했을까...
정말 사랑만으로 가득할 수는, 충분할 수는 없는걸까?
마지막 페이지의 반전...
그 순간이야말로 주인공이 가장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인 순간일 것이다.
우리네 현실의 사회집단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대로 말이다.
주인공은 집단무의식의 형태로 아버지란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비록 외관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불록한 젖가슴을 가진 어머니의 모습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