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로 그린 초상

연기로 그린 초상
빌 밸린저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7월

내 생에 최고의 미스테리라 꼽을 수 있는 "이와 손톱"의 작가 빌 S. 밸린저의 신간이다.
(7월에 나왔으니 신간은 아닌건가...^^;;)
아직 읽지 못한 주옥같은 미스테리의 고전들이 산재해 있긴 하지만
나에게 워낙 큰 만족을 준 작품의 작가이기에 더이상 뒤로 미뤄둘 수 없는 책이었다.
 

대니는 수금 대행을 하는 가난한 청년이다.
우연히 인수하게 된 수금 대행 회사의 지난 기록을 뒤적이다
그의 인생에 커다란 파문을 던질 한 여자의 사진이 실린 기사를 보게 된다.
대니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사로 잡혀 얼마 있지 않은 그녀의 흔적을 따라 추적을 시작한다.
책은 대니의 추적과 크래시의 삶을 번갈아 가며 보여준다.
크래시는 변두리 시골의 가난뱅이 삶을 지겨워 하는 여성이다.
뛰어난 미오와 남자를 사로잡는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이 두가지를 이용해 자신의 출생과 어린 시절을 지우고
평생 써도 줄지 않을 돈과 사회적 지위를 얻을 꿈을 꾼다.
크래시의 세번째 능력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그녀는 꿈을 향해 침착하게 나아갈 줄 아는 여성이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서둘러 단계를 뛰어넘으려 하지 않고 자신을 갈고 닦는다.
한때의 애정과 안정감에 안주하지 않고 그 피곤한 삶을 끝까지 자기가 주도하여
목적을 이뤄낸다. 한순간의 망설임도 그녀에게는 없다.
나는 이것이야말고 그녀의 진정한 능력이라고 보고 싶다.
 

전작과 달리 결말이 뻔히 보이는 구조이긴 하지만
그녀의 집착과 지치지 않는 욕망의 결과물은 실로 대단하다 할 수 있겠다.
대니와 크래시가 번갈아 자신의 이야기를 진행하는 바에 비해
가독성과 몰입도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섬세함과 치밀하게 짜여진 구성은 아니며 대단한 반전도 없다.
기막힌 트릭이 있다거나 뛰어난 재치, 번뜩이는 기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시 흥미롭고 재미있다. 
 

빌 S. 밸린저의 작품은 이제 겨우 2번째이지만
상황이나 처한 현실 혹은 사회적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이 너무 마음에 든다.
자신에게 지적 세상과 육체적 사랑의 기쁨을 알려준 직장 동료라던지
편안함과 안정된 삶을 준 군인 장교등과의 인연에서 안주하려는 모습이 없다.
크래시는 피곤하고 두렵고 지칠법한 기나긴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이와 손톱"에서도 주인공은 끝까지 자신이 누군지 모르게 함으로써
자신의 아내를 파멸로 이끌고 간 대상에게 진정한 복수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철두철미하고 일관된 그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희열을 느낀다.
내가 빌 S. 밸린저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