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학기

잔학기 ㅣ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두번재로 접한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이다.
워낙 강력한 포스의 그로테스크로 그녀를 알게 된 지라
잔혹기가 주는 당혹스러움과 충격은 그다지 크진 않았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도 신랄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숨겨진 여성의 내면 묘사는 여전하다.
 

10살의 어린 소녀가 25세의 청년에게 유괴된다.
그 청년, 겐지는 빛도 들지 않는 방에 소녀를 가두고
자신의 식사를 조금씩 나누어 주며 1년여가 넘는 시간을 보낸다.
겐지는 낮에는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소녀를 대하고
밤에는 소녀와 동갑인 나이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 방에서 탈출한 소녀는 가족이 있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겐지는 경찰에 잡히고 재판을 받게 되지만
소녀의 진술거부와 묵비권으로 인해 아무도 진실을 알 수 없게 된다.
 

1년여의 시간동안 소녀의 정신은 어른의 그것과 마찬가지일정도로,
아니 그보다 더 성장해 버린다.
극한의 세계를 경험한 탓인지...육체의 성장속도와 무관하게
교복을 입은 어린 중학생의 모습 안에는 다 자란, 그것도 비뚤어진
어른의 정신세계가 자리잡아 버린 것이다.
어린 시절에 어른들의 이중성과 성적인 충격,
외부와 단절된 상황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들...
납치범과 그 주변인, 어머니, 아버지, 잃어버린 생활...
그것이 소녀를 변화시킨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책에 나왔던 귀절이 떠오른다.
제목이 덫에 걸린 쥐였던가...
덫에 걸린 쥐는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 덫 안을 계속 맴을 돌며 달린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탈출구를 찾미 못한 쥐는 자신의 안으로 파고 든다는 내용이었다.
소녀를 보며 나는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올바른 정신으론 그 시간을 이겨낼 수가 없었던 소녀는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밖엔 없지 않았을까...
겐지의 변화(밤과 낮의...)와 신같은 존재로 여겼던 아베코씨에 대한 구원의 바램...
잃어버린 학교 생활과 평범한 일상이 이젠 너무 멀어졌다는 걸 인정하기 위해서도
소녀는 스스로 어른이 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실로 복귀 후에 소녀는 어른의 정신세계를 갖춘 자신을
교복을 입은 어린 소녀의 안에 감추는 것에 대한 편리함을 깨닫는다.
겉과 속이 다른 모습...그것은 비단 이 소녀뿐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현실을 살고 있는 일본인의 이중성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싶다.
숨겨진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가면의 웃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일본인들의 생활방식이 떠오르며 새삼 섬뜩한 기분이 든다.
책의 결말에서도 드러나지만
감추어진 진실이란, 크던 작던지 간에 충격으로 다가오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