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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한강을 읽는 한 해 (주제 2 : 인간 삶의 연약함) - 전3권 - 바람이 분다, 가라 + 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내 여자의 열매,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ㅣ 한강을 읽는 한 해 2
한강 지음 / 알라딘 이벤트 / 2010년 2월
평점 :
주제 - 희랍어 시간
희랍은 그리스를 한자로 발음 한 것이다. 희랍어는 고대그리스어를 칭하는 것으로써 지금은 통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는 죽은 언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소설은 이 죽은 언어를 통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접촉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유전으로 인해 시력을 점차적으로 상실해가는 남자와 환경적요인에 의해 말을 잃어버린 여자는, 남자는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가르치는 강사로 여자는 수강생으로 만남을 갖는다.
다른 소설이라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배로 나는 한강의 소설이 내포하는 함축적 의미를 온전히 이해해내지는 못한다. 채식주의자를 통해 아찔한 경험을 했다면 이번작 희랍어 시간을 통해서는 무한한 사유의 세계로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여전히 그녀의 문학적 세계는 나에게 난해하기만 하다. 물 속에 둥둥 떠다니는 언어를 한자한자 긁어모아서 읽어 내려가야만 하는 수고가 필요했달까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다시 왔어 여자가 침묵이라 부르는 그것은 17살이 되던 겨울에 처음으로 찾아왔다.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할뻔 했던 생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인이 박히도록 무수히 들어왔던 그 이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어쩌면 당연한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움츠러들고 소극적이 되어가던 중이었다. 그때도 모국어가 아닌 전혀 낯선 언어를 통해 침묵을 깬 관례가 있기에 이번에는 스스로가 그 침묵을 깨고자 선택한 언어가 고대 희랍어이다.
왜 하필 구어일까. 여자는 고대 희랍어가 아니라도 좋았다. 자신의 침묵을 깨버릴수만 있다면 더더 오래되고 더 생경하고 더 낯선 언어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여자에게 희랍어는 불가피하고 처절한 내면의 발버둥이었다. 수년전 이혼을 하고 세차례의 소송 끝에 경제적,정신적 부양능력이 미치지 못해 아들에 대한 양육권을 잃어버린 여자의 아들을 되찾기 위한 한가닥 빛이었다. 그 어떤 전조도 원인도 찾지 못한 침묵의 저변에는 여자를 둘러싼 정신적 압박이 존재했고 17살 처음의 그것과는 다르게 사후의 영원한 안식에 빠져든 침묵과도 같았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내리쬐는 태양 밑 흙바닥에서 모국어의 음운들을 처음 발견했던 그 강렬한 기억만치 그녀의 언어적인 특출남은 타고 났었다.
남자는 15년을 모국에서 또 그만큼의 세월을 외국인 독일에서 보냈다. 의사는 그가 마흔살이 가까워오면 시력은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으나 그 나이가 가까워오고 있는 현재, 아직 영원한 어둠에 잠기지는 않았다. 어쩌면 마흔살이 지나도 이 상태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어둠에 익숙해지도록 체념하지만 기대 또한 져버리지 않았다. 아직은 초록색 동글뱅이 안경을 끼면 희랍어 강의 정도는, 까만 밤이 아니고서는 외출하는데 큰 무리가 있지는 않다. 이런 남자에게는 오래도록 빛바래지 않는 첫사랑의 기억이 있다. 청력을 상실해서 말을 하지 못했던 그녀와의 사랑을 스스로의 오만한 실수로 영원히 잃어버린 가슴 아픈 기억. 그래서 더 희랍어시간의 수강생 여자가 침묵하는 것에 신경이 쓰였던건지도 모른다. 첫사랑 그녀가 떠올랐다.
소설 중후반까지도 각자의 이야기가 반복해서 이어진다. 이 두사람이 끈끈하게 접촉하는것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다. 그 순간에 말을 잃은 그녀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 이 두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빛에서 멀어지는 남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토해내고 말을 잃은 여자는 묵묵히 들어주면서 서로간의 내밀한 소통을 한다. 그 소통으로 인해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다라는 결과적 의미는 없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래서 더 두 사람의 빛과 소리는 그들만의 의미를 갖는다. 남자가 영원히 빛을 잃어버렸는지, 여자는 침묵의 벼랑에서 되돌아서 걸어왔는지 어떻게 상상하든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내든 그건 순전히 독자 개개인에 달려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순히 별점 몇개로 책의 내용을 평가내리는 것에 회의적이 되어가고 있다.
한강의 소설은 단순히 별점으로 어떻게 평가 내릴 수 없다. 그러기에는 나의 문학적 소양이 한참 덜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많은 사유의 바다를 헤엄치게 만들어주지만 아직도 나는 그녀의 작품은 모호하기만 하다. 소설의 유형은 다양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소설은 두가지다. 간결한 언어의 향연임에도 불구하고 함축적 의미가 무수히 깔려있는 소설과, 복잡한 언어속에서도 그 의미나 주제를 캐치해내기 쉬운 소설. 나에게 한강님의 소설은 전자에 속한다. 이 간결하고 쉬운 언어의 나열 속에서 어떻게 이런 소설이 나오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여전히 그녀의 소설은 나와 분투하게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