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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들은 그 책의 작품성보다 메시지가 주는 호소력이 뛰어나서 유명해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공지영 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경우 우리나라 사형제도에 대해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것으로 유명하다. '메시지가 문체를 압도해서 문체의 뛰어남이 돋보이지 않을 뿐이다.'라는 주장이 나올만큼 메시지가 강렬했던 한 예이다. 이처럼 메시지가 사회적으로 파급력이 큰 경우 책도 많은 인기를 얻기 마련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메시지가 강한 작품의 전형적인 예이다. 솔직히 이 책에 많은 기대를 했었다. 워낙 유명하고 수십년동안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은 작품에 기대를 거는 게 어찌보면 당연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내가 문체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의 문체가 그리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대문호의 반열에 든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섬세한 필치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진기할 정도로 작품에 빠져드는 맛이 있는데, 이 작품은 그런 느낌까지는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플롯 자체는 무척 재미있고, 신선하다. 조금 지나치게 말한다면 문체보다는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겠다. 하퍼 리는 미국인들, 미국 사회의 아주 본질적인 문제를 아주 멋지게 다루고 있다. 물론 좋은 작품이 대개 그러하듯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세계 모든 사람들의 아주 큰 이해관계가 걸린 핵심적인 인간 본질의 문제가 이 작품에서 펼쳐진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정체성이 있다. 이 정체성이 형성되는 데에는 가족, 사회, 국가, 종교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울타리들이 큰 역할을 하고, 그 본질을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뿌리박힌 울타리 안에서 안정감을 찾지만, 동시에 안정감이 침해당할 것을 경계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와 같은 울타리를 공유하지 않는 타자와의 만남은 언제나 긴장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긴장감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가이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본성은 양심만으로 가득차 있지 않다. 그 본질 속에는 이해관계와 권력관계가 내재해 있기 마련이다. 일례로 나와 울타리를 공유하지 않는 타자를 대할 때 우리가 다수이면서 강자라면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해를 끼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폭력적이 되기 쉽다.
그러나 우리 안에 내재된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양심이라는 또다른 양면적 속성이 있다. 우리의 양심은 나와 다른 타자도 나와 동일한 인간이며, 마땅히 존종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의 양심의 소리에 따른다면 내 정체성에 내재된 울타리를 확장하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나에게 힘이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나에게 힘이 있다면, 법보다 주먹이 더 손쉬운 해결책이 된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법조차 힘의 논리를 따라가는 경우가 있으니 실제적으로 힘의 논리는 현실세계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 작품은 흑인 톰 로빈슨이 강간혐의로 체포되고 법정에서 재판받는 사건 전후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톰 로빈슨의 변호를 맡은 애티커스 변호사의 딸이자 일인칭 화자인 스카웃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층 성장하게 된다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미국 남부의 흑백갈등, 재판과정, 남부 사회의 모습등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어 미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있어서도 교과서 이상의 역할을 감당하리라 여겨진다.
이 책은 또한 미국에서 4천만부 이상 팔리며 성경 다음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은 책으로 꼽히기도 한다. 미국인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의 문제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인기는 미국인으로서의 도덕적 자긍심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현실세계에서 힘을 가진 미국은 법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곤 한다. 그렇다고 미국을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도 이 점을 인식하고 이 책을 폭발적으로 성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내 관점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애티커스 핀치의 말처럼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참말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호이해에 기반하지 않은 관계는 종국에는 파괴적인 결말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이 단순히 양심의 문제만을 다루지 않고, 역지사지를 통한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이 책이 인기를 누리는 비결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