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 지리학의 눈으로 보는 농촌의 삶, 장소 그리고 지속가능성
마이클 우즈 지음, 김종수 외 옮김 / 따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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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정책연구소에 몸담고 있는 나는 전국에 산재한 귀농학교에 매달 몇 차례 강의를 나간다. '전국귀농운동본부' 강의도 있지만 대구, 칠곡, 의성, 광명, 군포, 순창, 서울 등 지자체 강의도 나간다. 요즘은 더욱 귀농학교 수강생들의 계층 구성이 다양하다는 걸 체감한다. 귀농자의 연령도 다양한데 특히 젊은이가 늘고 있다. 어느 지역 귀농학교건 마찬가지다.

보수정부건 민주정부건 가릴 것 없이 모든 역대 정부들에 의해 버려졌다고 진단되는 우리의 농촌에 일부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는 일시적인 현상일까? 우리나라만의 특징인가? 대도시는 도시농업에 열을 올리고 대기업도 농업투자를 늘인다. 왜일까?

책 표지 <농촌(마이클 우즈. 따비출판사. 2016. 12.)> 책 표지
▲ 책 표지 <농촌(마이클 우즈. 따비출판사. 2016. 12.)> 책 표지
ⓒ 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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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책이 나왔다. 도서출판 '따비'에서 나온 <농촌>이라는 책이다. 우리나라가 치중하는 농촌개발이나 마을 만들기, 촌락공동체 복원이나 농촌관광 등의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농촌에 역사적, 지리학적으로 접근하는 책이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역저 <사피엔스>에서 밀이나 감자, 쌀 등의 곡식재배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면서 농업혁명을 인류에 대한 대 사기극이라고 도발적인 주장을 한 바가 있는데 <농촌>은 현실을 차분하게 인문학적으로 분석한다.

"농촌의 행사는 포용의 장소이자 배제의 장소다. 공동체의 통합에 기여할 수도 있지만, 공동체 규범에 따르지 않는 집단을 암묵적으로 배제할 수도 있다. 가령, 농촌 전통이 부활해 인종이나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면서 공동체 내부와 외부의 집단에게 공격적일 수 있으며...(261쪽)"

이처럼 농촌의 생태공동체를 유토피아처럼 여기는 우리나라의 일부 흐름과도 차이를 두는 분석을 하고 있다. 여러 나라들의 역사를 아우르며 많은 실증 사례도 보여준다.

저자는 "특정 지리적 장소에 대한 소속감에서 비롯된 농촌공동체의 의미는, 거주와 실천의 지속성을 강조함으로써 외부자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야기할 수 있다"면서 영국의 지역공동체가 망명신청자용 수용시설 건설에 반대한 사례나 호주의 데일스퍼드에서 2008년 열린 게이·레즈비언 축제 사례가 대표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 따라 거기에 맞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소농을 농촌사회의 주춧돌이자 농촌환경의 지킴이로 부르는"(295쪽) 이유를 국제협약이나 개별 국가의 정책변화의 흐름에서 소개하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1958년에 설립된 로마협정이 공동농업정책(CAP Common Agricultural Policy)을 제안했던 사례가 그것이다.

CAP는 농산물의 최소가격 보장과 환경에 기여하는 방향으로의 농지운영, 농가의 생활보장은 물론 소비자에게 적정가격의 안전한 먹거리 공급을 선언하면서 농업의 문화유산 보호를 채택했다.

이 책의 구성은 독특하다. 제 1장이 '농촌에 접근하기'이다. 마지막 9장은 '농촌을 다시 만들기'이다. 그 사이에 농촌에 대한 상상하기와 소비하기, 살기, 농촌을 수행하기, 규제하기 등등의 쟁점들을 일목요연하게 배치해 놓고 있다.

요즘은 대선국면이다. 일부 언론매체들에서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 속에 농촌과 농업을 찾을 수 없다면서 농업공약의 취약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농가소득이나 농촌발전, 직불금이나 농민기본소득 등에 대한 획기적인 대책을 기대하는 논조라고 하겠다.

대통령 후보들의 다른 분야 공약들과 비교 하면 그런 주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책은 농업정책이 정녕 어디에 뿌리를 두어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철학과 역사의 안목을 갖고 농업정책을 살펴보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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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라는 따뜻한 감각 - 몸의 신호에 마음을 멈추고
예슬 지음 / 들녘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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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내게 말을 건다. 내가 나에게 해야 할 말들, 알고는 있으나 잊었던 말들을 이 책 속에서 발견한다. 밑줄로 확인하며 다짐해야 하는 말들을 숱하게 본다. 오늘도 거뜬히(!) 자리에서 일어 날 수 있다는 이유로 까맣게 잊고 사는 말들. 병을 얻어 극심한 고통 앞에서 비로소 되새김질 하게 되는 말을.

저자인 26살 여성이 오른쪽 난소에서 20센티미터나 되는 '경계성' 종양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대상조차 알 수 없는 노여움과 원망의 응어리를 마주해야 했다. 온갖 생각들이 뒤엉켜 소용돌이 칠 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컥컥 울면서 병원을, 그것도 무조건 '큰' 병원을 찾아가는 것밖엔.

처음에는 세상을 향해 따질 듯이 "원망과 화가 뒤엉킨 질문들이 고함처럼 내 안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누구도 답해 줄 사람이 없었고 길을 잃은 질문들은 차가운 하늘에 깃발처럼 나부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동일하다. 누구에게나 여기까지는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 다음부터 달랐다. 그 과정이 농밀한 자기와의 대화 형식으로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몰인정하고 건조한 병원. 수술하라는 한 마디 외에 환자의 연이은 질문에는 "네에~", "네에~"를 연발하면서 환자기록 화면만 바라보면서 왜 이리 귀찮게 하냐는 듯 건성인 의사. 저자는 결단한다.

"몸 전체를 조화롭게 연결된 하나의 유기체로 보지 않고 부위별로 나눠서 따로 판단하고 바꾸거나 없애는 것, 몸이 가진 자생력과 치유과정을 병증으로 보고 무력화시키는" 의사와 결별한다.(25쪽)

이 결단이 쉽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한다. 건강할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들면 병원에서 약물에 의지하여 지루하게 사느니 어디 숲 속에 들어가서 곡기를 끊고 <스코트니어링>처럼 맑고 곱게 생을 마쳐야지'라고 하지만 정작 병이 들면 이런 판단과 정신 자체가 흐려진다. 숲으로 들어가야 할 시점인지 자꾸 지연된다. 이것만, 이번만, 마지막으로, 혹시 모르니까 등을 연발하며 숲으로 들어 갈 시점을 놓치고 만다.

스물여섯 처자는 병원을 나서서 어디로 갔을까. 딸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한결같은 엄마의 지지에 힘입어 서울을 떠나 고향인 통영으로 내려와 엄마와 함께 자연치유의 길을 간다. 그 과정이 이 책의 백미인 자기와의 적나라한 대면이 시작되는 내용들이다.

생채식과 단식, 소식과 절식을 하면서 허기와 직면한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경험을 갖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허기가 무엇인지 모른다. 현대인들은 배고파서가 아니라 맛이나 재미, 심심풀이로 끊임없이 먹는다. 앉아서도 서서도, 들고 다니면서도 먹는다. 저자는 배고픔을 생생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것이 삶에 대한 의지이자 동력임을 본다. 자신을 격려하는 몸의 응원 소리라고 읽어낸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피부가 변하고, 습관이 변하고, 두통이 변하고, 체질이 변하고, 체형까지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거울 앞에서 알몸을 제대로 본다. 섬세한 감각으로 발견한다. 평소에는 관심조차 없던 곳에 시선이 가 닿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저자의 깨우침은 책의 모든 페이지에 고스란히 담겨진다. 살이 빠져 날씬해진 몸매를 보고 "괜찮아 보이는데?" 하다가 금방 "그게 아니지. 살아 있어서 고마워. 몸과 마음 즐겁게 건강히 살아야지"라고 되뇐다.

무겁고 칙칙한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나서도 그 악몽에 끌려 다니지 않고 꿈속의 땀과 비명과 눈물이 자신의 어둠과 무거움을 떨쳐내기 위한 치유 과정이라면서 자신을 격려한다.

자작가수인 저자 '예슬'은 해외공연을 위해 대만에 체류하던 중 음식을 잘못 먹어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의식을 잃다시피 했고 죽음이 코앞에 어른거렸다. 오토바이에 실려 병원에 실려 갔다. 이런 큰 소동을 빚은 저자는 감사하게도 다시 '깨어났다'고 술회한다.

깨어나다. 깨우침. 알아차림. 깨닫다. 이런 경지는 의식의 차원을 넘어가는 경계다. 삶의 모든 고비에서 우리는 깨달음의 기회를 만난다. 곤란과 위기를 통해서만 깨달음은 온다. 그러나 대부분 그걸 놓친다. 깨달음은 고통과 압박의 이면에 숨어서 오기 때문이다. 저자의 책이 갖는 핵심은 바로 이 부분으로 보인다. 갖은 곤란 앞에서 그것을 수용하고 '깨어나는' 과정으로 승화하는 장면이다.

식욕, 구겨진 감정들, 성욕과 애정욕, 수면욕, 숙성되는 시간, 자신에게 질문하는 시간, 물꼬를 트는 시간, 자신을 배우고 확장하는 시간 등을 별도의 꼭지로 만들어 하나하나 자신과 만나나가는 대목이 있다. 그러면서 도달한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욕망을 없애거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섬세하게 알아차리고 그것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저자가 자연치유 센터에서 막무가내인 중학생을 만나 짜증이 나는 대목이 있다. 종일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게임만 하는 아이다. 밥을 먹고 숟가락을 던지면 설거지도 않고 청소도 않는다. 뭐라 얘길 하면 힐끔 쳐다만 보고 마냥 태평이다. 짜증이 나면서 저자는 바로 깨닫는다. "아. 내가 쟤를 질투하고 있구나"라고.

늘 야무지다느니 예의바르다느니 똑똑하다느니 잘 챙긴다는 말만 듣고 자라서 한 치라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강박에 묶였던 자기를 본다. 저렇게 한 번도 해 보지 못해서 부러운 마음에 질투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짜증을 식별한다.

책을 읽다보면 한 권의 시집을 읽는 느낌이 든다. 절제된 표현들과 압축된 언어들. 감각이 살아 숨 쉬는 어휘들. 여전히 종양과 함께 살아가는 저자. 책의 제목처럼 고통을 살아있는 따뜻한 감각이라고 말하는 저자. 저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슬아. 엄마 아빠 다 잘 계셔? 너는 이제 좀 어떠니? 네가 이런 고비를 겪었다는 걸 전혀 몰랐어."

저자는 그때처럼 "아버님~" 했다. 코흘리개 14살 때에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때는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들이나 다들 누구누구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저자는 내 딸과 친구다.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다. 중학 과정인 '실상사 작은학교'.

책 뒤에 있는 저자의 노래시디(CD)를 돌릴 시디드라이버가 없어서 오늘 문자를 보냈다. 혹시 mp3 파일이 있는지를. 노래를 들어보면서 그녀의 선택과 용기에 다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종양과의 사이 좋은 동거를 축하하고 싶다. 책은 엊그제 병원에 다녀 온 이웃에 빌려줬다. 예슬이를 만나면 서명을 받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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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 영화 '남영동 1985'의 주인공 김근태 이야기
방현석 지음 / 이야기공작소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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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이라는 책이 있다. 베트남 전쟁이야기다. 전쟁이야기라고 해서 전쟁영웅들의 무용담으로 여기면 오해다. '미제의 용병 남조선군대'가 베트남 인민들을 어떻게 학살했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김현아는 말한다. 역사는 결국 기억의 전쟁이라고!

 

3년 동안이나 베트남 전역을 누비며 베트남 전쟁 당시의 현장과 생존자를 만나 확인한 이야기들은 결국 기억의 전쟁에서 지지 않기 위한 저자 나름의 노력이다.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이라는 기억을 되살림으로 우리가 일제의 종군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에 비로소 균형있는 시선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평화를 목마르게 갈구하게 한다.

곧 치러지는 12월 19일의 18대 대통령 선거에 우리는 또 다른 '기억의 전쟁'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기억의 전쟁에서 이겨야 온전한 미래를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책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이야기공작소 펴냄)를 쓴 저자 방현석의 의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밤 새워 읽은 책의 끝장을 덮으며 든 생각이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아니면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부를 때. 이 순간이 얼마나 참혹한 무너짐의 순간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누군가의 실명을 불면서 고문 앞에 무릎을 꿇어 본 사람만이 안다. 김근태가 견뎌야 했던 남영동 대공분실 5층. 키 높이에 겨우 장작개비만한 창문이 세로로 딱 하나 박혀있는 그 까만 먹방에 들어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방현석이 이런 뜻으로 책의 제목을 정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차라리 김근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한 김근태의 바람을 담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어울릴 수 있지만 내가 겪은 남영동에서의 '기억의 전쟁'은 다르게 해석한다.

해외유학 포기하고 험한 길 선택한 김근태

저자가 평전이 아니라 소설 형식을 취한 것은 탁월한 선택으로 읽힌다. 작가의 상상력 때문만이 아니라 구성의 자유로움이 돋보인다. 기억의 조각들을 원활하게 이어주는 글의 흐름 때문이다. 재야 사학자 이이화 선생이나 성공회대 한홍구 선생의 현대사 강의를 듣는 느낌이다. 김근태의 삶을 따라 1970년대와 80년대 우리 역사의 격랑을 접하게 된다. 남자건 여자건, 동생뻘이건 조카뻘이건 '근태형'으로 불리던 바로 그 김근태.

이야기의 전개는 중국의 작가 위화(余华)가 쓴 장편소설 <인생>을 떠올리게 한다. 장예모감독과 여배우 공리로 기억되는 그 작품 말이다. 시골 촌로 '푸구이'의 가정사를 다룬 작품이지만 산다는 게 뭔지에 대한 서늘한 감상을 주는 역사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유년기의 재치어린 일화들, 중고등학교 시절의 못 말리는 범생이 김근태는 대학 1학년까지만 해도 이후의 행로를 상상하기 쉽지 않다. 전형적인 학자가 될 모습이다. 은사인 변형윤 교수가 김근태를 장학생으로 추천하여 해외유학을 권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때 김근태는 갈등을 거듭하다 용감한 결단을 내린다.

나는 가방을 손에 든 채 오래 강의동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켰던 강의실의 창문들이 눈에 와 박혔다. 빈 강의실을 지키며 밖을 내다보던 창을 오늘은 밖에서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학원방위 상대 학생총회'가 열리는 본관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얼마나 먼 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는지, 나는 그 순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95쪽)

유학을 마다하고 험하고 먼 길 나서는 김근태의 이날 결단은 그 뒤에도 고비마다 이어진다. 고문실에서 내가 인간 백정들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가 있다. 김근태의 진술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말이었다.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명단을 짜 맞추기 위해 가해지는 고문을 김근태처럼 견뎌내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1983년에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만들기 위한 사전모임이 역곡 전철역에서 걸어가면 20분 남짓 되는 김근태 집에서 열렸을 때 나도 갔었다. 박계동, 이범영 등등이 모였다. '근태형'이 왜 나를 불렀는지 당시에는 몰랐다. 노동쪽과 청년쪽에 대한 이중 구상을 이런 식으로 내게 전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공개적으로 활동하던 1980년 늦가을, '근태형'이 인천 구월동 주공아파트에 살 때는 내가 집에 가더라도 다른 쪽 사람은 못 만나게 하던 사람이었다.

'2012년을 점령'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이름들

긴급조치, 지학순, 함세웅, 민청학련, 동일방직, 조화순, 주동과 조동, 중앙정보부, 인혁당, 박정희… 그리고 광주가 나오고 남영동이 나온다. 끝내 김근태를 고문 후유증으로 죽게 한 남.영.동. 대학생 박종철이가 물고문으로 죽었던 바로 그곳이 나온다.

여기에 적힌 단어들은 기억의 전쟁에서 끝까지 놓치지 않아야 할 이름들이다. 같은 맥락에서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 박근혜가 떠올리기 싫어할 이름들이다. 어떤 식으로든 자기의 영예와 연결되어 있는 피고름 흐르는 역사의 질곡들이다.

민청련 배후에 대해서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대표하는 권오경(권호경) 목사와 함세운(함세웅) 신부를 내 배후로 제시했고, 저들도 동의해 주었다. 두 분께는 너무나 죄송했지만 이 두 분은 내 비겁을 용서해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두 분만큼 방어력을 가진 분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이렇게 저들이 준비한 각본에 필요한 내용은 모두 채워졌고 칠성판에 누워 총복습을 했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357쪽)

방현석은 <랍스터를 먹는 시간>으로 그나마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의 죄책을 덜어준 작가다. 한국의 청년작가들을 이끌고 베트남으로 가서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 지역 생존자들을 만나고 쓴 소설이다. 이런 작품이 한국에서 나왔다는 것은 글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베트남 인민에 대한 죄의식을 경감해준다.

'2012년을 점령하라'고 한 김근태를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한 '근태형'으로 복원시키는 책이다. 김근태의 손짓과 말투, 표정까지 생생하게 되살려 준다. "결단 이후에는… 결국은 외로움이야, 외로움과 맞서게 돼" 라든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눈은 살그머니 내려 깔고 "그건 폭력이야… 경멸해야 돼". 2012년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기억과의 전쟁에서 이겨야한다며 흐려지고 오염된 우리의 기억을 되살려내는 책이다.

소설의 형식을 취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을 등장시키지 않기 위해 한 이름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쓴 경우도 있으나 없는 진실은 여기에도 없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권호경을 권오경으로, 함세웅을 함세운으로 한 것 역시 소설 형식에서 온 가명들이다. 장영달은 장영담으로 되어 있으나 기억력 있는 눈치 빠른 독자들은 금세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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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로부터 - 흙살림 이태근과 쌈지농부 천호균이 주고받는 농사와 기업과 새로운 삶
이태근.천호균.이인경 지음 / 궁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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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시장님. 서울 광장에 논 만듭시다."

아랫동네 사는 한 젊은 농부는 사과 농사를 해서 5000만 원의 판매고를 올렸다면서 한숨을 푹푹 쉬었다. 농약 값에 기계 값을 빼면 자기 인건비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농약 값이 얼마나 들고 일손이 얼마나 들었기에 5000만 원이 모자랄까?

농사를 지으면서 들어가는 비용은 농사 지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요즘 농사는 특히 그렇다. 사과 농사의 경우 2월부터 일이 시작된다.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전지 작업을 시작한다. 사과 가지 하나하나를 쓰다듬듯이 하며 가지치기를 하는데 전문 인력 하루 일당이 20만 원을 웃돈다. 사과나무를 파먹는 벌레를 잡기위해 살충제를 쳐야하고 가지 하나하나를 끈으로 묶는 작업을 한다. 가지가 햇볕을 잘 받아야 하므로 지주에 끈으로 일일이 매서 골고루 벌려준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면 '카바릴수화제'라는 적과제를 쳐 줘서 적당한 개수의 열매만 남기고 다 솎는다. 그래야 사과가 굵다. 반사 필름 깔아서 사과가 고루 붉어지게 만들어야 하고 올처럼 추석이 이른 때는 불가피하게 지베렐린이라는 생장 촉진제를 뿌려줘야 추석 대목 출하가 가능하다. 거름을 주고 살균제, 착색제, 유화제를 뿌리는 것은 기본이다.

공사(工事)가 된 농사(農事), 공장이 된 농장

요즘 농사는 사람이 짓지 않는다. 기계가 짓는다. 과수뿐 아니고 채소 농사나 쌀농사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휴대폰 농법'이라는 게 등장했을까?

70대 할머니가 휴대폰 하나로 열 마지기 쌀농사를 짓는다. 못자리는 농협에 주문해서 묘판을 사 오고, 로터리는 물론 모심기는 기계를 부른다. 농약 치는 것도 대행 업자에게 맡긴다. 요즘 콤바인은 아스팔트에 깔개를 깔고 탈곡한 나락을 좍 널어준다. 아니면 건조기를 거쳐 알피시(RPC·미곡 종합 처리장)에 차떼기로 나락을 넘기면 농사 끝이다.



기계가 농사를 짓는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석유가 짓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농약이건 농기계건 기타의 농자재가 모두 석유다. 비닐로 대표되는 석유화학 제품이 농장과 농토를 뒤덮고 있다. 도시로 다 빠져나가버리고 주인 없이 텅 빈 집들이 을씨년스러운 농촌에 농약과 농기계와 석유화학 농자재가 농촌 노동력을 대체했다. 그 결과는 어떨까?

농약 회사, 농기계 회사, 기름 장사, 기계 회사, 전자 회사가 불황 없이 돈을 번다. 종자 회사, 사료 회사, 묘목 회사가 돈을 번다. 흉년이어도 그들은 돈을 번다. 올해의 배추나 무처럼 과잉 생산이 되면 다음 작물을 넣기 위해 농민은 시커먼 가슴으로 논밭을 갈아 엎어버려야 하지만 그와 관계없이 그들은 돈을 번다. 농업의 공업화가 심각한 수준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마다 1억 원 소득 농가가 5000가구니 1만 가구니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다. 농가 부채는 줄지 않는다. 지난 7월부터 5인 이상의 모든 사업장이 5일제 근무가 확대 실시되었다. 일요일은커녕 국정공휴일도 없이 일하는 농민은 비닐하우스와 시설 재배 덕분에 농한기도 없다. 가히 전 농민의 머슴화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업들에게 속박된 농업, 농민의 현실이다.

공장이 되어버린 농토는 끔찍한 후과를 치르고 있다. 농지의 사막화다. 농약과 비료를 넣지 않으면 농사가 되지 않을 정도로 '땅심'을 잃었다. 종자 회사는 이른바 다비성(비료를 많이 요구하는) 종자를 개발한다. 다 수확의 미명 아래 개발된 개량 종자들은 내성과 생명력이 취약하여 더 많은 농약에 의존한다. 그래서 종자 회사가 농약도 만든다.

새로 개발된 종자는 그 종자에 맞는 농약도 함께 개발한다. 우리나라 농약 수는 800종이 넘는다. 제초제만도 250종이다. 땅도 죽지만 농심도 매 마른다. 농약 잔류 검사나 토양 검사에서 검출 가능한 농약은 300종이 채 안 된다. 500여 종의 농약은 시료를 채취해도 검출되지 않는다. 고스란히 밥상을 오염시킨다. '생물 농축'에 의해 농사짓는 사람은 물론 모든 사람의 몸속으로 스민다.

"비싼 유기농은 부자 음식?"


▲ <농부로부터>(이태근·천호균 지음, 궁리 펴냄).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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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근 '흙살림' 소장은 말한다. <농부로부터>(궁리 펴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값 싼 관행 농법으로 지은 농산물은 물, 공기, 토양, 지구 온난화 등 사회 공공재를 파괴하여 모든 시민들에게 부담지우고 있다고. 결코 싼 게 아니라고.

사실 그렇다. 아토피기관지 질환이니 발암률 증가나 성인병 등의 직간접 인과 관계가 공업화된 농업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라에서는 물론 기업에서 이런 연구에 연구비를 지원하지 않으니까 전문가들이 연구를 하지 못해서 그렇지 관행 농법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비용을 산출하면 유기 농산물 가격보다 비싸면 비싸지 절대 싸지 않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어쩌면 농업의 공업화는 농정 관료와 의료 자본의 협잡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오염된 음식과 과도한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지출되는 의료비는 엄청난 수준이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 농업기술센터 종사자는 농기계 회사, 농약 회사, 종자 회사의 외판 사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비등하고 있는 식물 공장, 빌딩 농업은 그 선두에 있다. 우리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지만 농업 관련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다. 정부 기관에서 하는 모든 농업 교육은 농약과 농기계와 종자 소비를 촉진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최근 상업화된 유기농 역시 마찬가지다.

이태근 소장의 주장에 토를 다는 사람이 있다. '쌈지농부'의 대표 천호균이다. '관행 농업'이 아니라 '화학 농업', '농약 농업'이라고.

이 두 사람의 대담을 기록한 <농부로부터>는 우리 농업의 현주소를 실감 나게 드러내 준다. 사회주의 문학에서 집단 창작을 통해 개개 작가의 역량을 사회화, 집단화하는 매력이 있듯이 관심 분야가 같은 두 색다른 전문가가 주제를 넘나들면서 나누는 이야기는 한 사람의 전문가가 쓴 책과는 전혀 다른 질감을 지니고 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판에 끼어들게 한다.

두 사람 다 핵심 주제들을 대화로 풀면서 저절로 고양되는 분위기에 힘입어 기발한 착상과 촌철살인의 현실 진단을 주고받는다.

특히 서울 인사동에 '쌈지길'을 만들었고 사회적 기업 '쌈지농부', 생태 문화 공간 '논밭예술학교'를 운영하는 천호균은 서울시청 앞 광장에 논을 만들자고 한다. 이제 우리는 성장이 아니라 성숙으로 가야 한다면서 도시에 텃밭을 만들어 소외 계층에게 무상 분양하고 텃밭 치료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한다.

문화라는 영어말의 '컬처(Culture)'도 원래는 경작하다는 뜻인 컬티베이트(Cultivate)에서 유래한 것이라면서 농부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여야 하고 그 본래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를 경작하자

몇 년 전부터 내가 일하고 있는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는 '도시를 경작하자'는 표제를 걸고 도시 농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태근은 도시 농업의 의미를 더 심도 있게 풀어 놓는다.

도시 농업은 자기 밥상을 자기 손으로 차리는 차원을 넘어,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의 텃밭 하나, 마음의 텃밭 하나씩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손길로 생명체를 가꾸면서 생명의 존귀함을 재인식 하고 인간 본성으로의 회귀를 도모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독일의 의사 다니엘 고트롭 모리츠 슈레버는 환자를 진찰하면서 처방을 이렇게 한다고 소개한다.

"밝은 햇볕을 더 쬐시고 맑은 공기를 마시세요. 푸른 채소 농사를 지으세요."

진정한 농부는 작물의 시간을 함께 살아내는 것이라면서 기다림의 시간을 단축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재앙을 불러 올 것이라고도 말한다.

내가 짧지 않은 기간 친분을 유지해 온 이태근의 말에 신뢰가 가는 것은 그가 평생을 흙을 살리는 농사에 전력해 온 것을 알기 때문이다. 흙이 살아야 농사가 살고 농민이 산다는 것을 그는 일찌감치 터득하여 20여 년을 홀로 난관을 헤쳐 온 시대의 사표다. 누가 무슨 말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가 어떻게 살아 왔느냐가 그 말의 무게를 더해주는 법이다.

밥 한 공기 쌀값이 자판기 커피 값보다 싼 현실을 개탄하기에 앞서 도시를 농촌이 먹여 살리고 있다는 사실부터 잊지 말아야 한다는 <농부로부터>라는 책 이름은 천호균이 만든 매장 이름이다. '흙살림'의 유기 농산물 전문 매장이다. 이처럼 농민의 친구를 자처하는 도시인들이 많이 나오기를 염원하게 된다.(궁리. 2011. 10. 이태근/천호균.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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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에 물들다 - 주말농사에서 만난 풀꽃세상
이수경 지음 / 북하우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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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째 농사를 지으면서 아직껏 시작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들에 나갈 때마다 이만저만한 이유를 대면서 나를 변명하지만 포기 하지는 못하고 여태 꿈만 꾸고 있는 것이 있는데 길가와 논밭에 저절로 피었다가 돌보는 이 없이 홀로 져 가는 풀꽃들에 대한 기록이다.

수목원이나 식물도감을 뒤지지 않더라도 집 주변과 들판에서 피고 지는 풀꽃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이 수많은 풀꽃들은 끈질긴 생명력도 생명력이지만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모나지 않게 살다 가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고 발길을 붙들게 한다.

나는 풀꽃들에 대한 기록을 하되 좀 색다르게 하고 싶다. 모든 누리집과 관련 책에서는 꽃이 활짝 피었을 때 모습만 있다. 풀꽃 분류를 하더라도 봄에 피는 꽃, 여름에 피는 꽃 등으로 되어 있어서 꽃이 피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것이 어떤 꽃을 피워 낼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 늘 아쉬웠다.

나는 풀꽃의 일생을 기록하고 싶은 것이다. 꽃이 피는 기간은 잠시일 뿐, 그 꽃이 있기까지 나머지 기간에는 어떤 모습인지 기록한다면 언제 어디서건 사계절 풀꽃을 동시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초록에 물들다>는 내 꿈과 꼭 같지는 않지만 집 주변의 풀꽃이야기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지은이 이수경은 풀꽃 이야기 뿐 아니라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주말농장과 농막에 함께 살고 있는 여러 곤충들 이야기도 하고 있는데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또 한 송이의 꽃이다.
가령 이렇다.

동자꽃은 탁발하러 마을로 내려간 스님이 눈이 많이 내려 산 속 암자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동자승이 홀로 스님을 기다리다 굶어죽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어났다는 꽃이다. 동자승처럼 귀엽게 생긴 이 꽃은 항상 산 아래쪽을 향해 핀다고 한다. 동자승이 산 아래쪽 마을을 바라보며 스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듯이....

지은이의 해박한 관심분야가 동화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들이 많이 있는데 벌레 한 마리 꽃 한 송이를 보면서 늘 재미있는 동화와 연결 짓는다.

한번은 냉장고를 열었더니 조그만 청개구리가 붙어 있었나보다. 냉장고 안에서 싸늘해진 개구리가 고무장갑을 낀 손가락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 청개구리인지는 모르지만 풀 섶으로 되돌려 주면 다시 와서는 텔레비전을 같이 앉아 보자는 듯 방 벽에 붙어 있기도 하고 목욕탕 수도꼭지에 올라않아 있기도 했다고 한다. 세숫대야 옆에도 숨고 빨래판에 달라붙어 있는 걸 쫒으면 신발 속으로 기어들기도 하였다.

지은이는 이 대목에서 공주를 따라다니며 약속을 지키라고 떼를 쓰는 동화 ‘개구리 왕자’를 소개한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져들 때 걸려드는 ‘마술’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여진다. ‘왕자’가 아니라 힘든 밭 갈기를 대신 해 주고 무거운 퇴비를 날라주며 헐거워진 낫자루를 새로 깎아 끼워 줄 ‘머슴 개구리’라도 있었으면 하는 지은이의 넋두리는 글 읽기의 재미를 더해준다.

콩 넝쿨을 보면서는 ‘잭과 콩나무’라는 동화를, 거미를 한 마리 발견하고서는 길쌈 솜씨가 뛰어났지만 지나친 자부심 때문에 평생 실을 짜는 거미가 되어버린 그리스 신화 속 ‘아라크네’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이다.

사실 꽃에 얽힌 전설과 신화는 웬만한 들꽃 책이나 꽃말 책에 나온다. <초록이 물들다>는 식물도감과 곤충도감을 펼쳐 놓고 독자와 함께 뒤적뒤적 하면서 하나씩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135쪽에 벌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동물다큐에서나 볼 수 있는 벌새를 발견하고 이수경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벌새를 아쉬워하며 이렇게 말한다.

‘유명 인사를 마주 대하고도 사인을 받지 못한 것’ 같았다고. 열대지방에서 서식하는 벌새가 나타났다는 것이 신비하고 놀라워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그것이 ‘꼬리박각시’라는 나비도 아니고 나방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과정은 영상만 없을 뿐이지 다큐 한 장면 같기도 하다.

물론 이수경은 풀꽃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도시에서 책을 만드는 일을 한다. 시골에 농막을 짓고 주말마다 애인 만나듯 농장에 가서 알뜰하게 농사짓는 사람이다. 농사지으면서 만나게 되는 풀꽃과 작은 동물, 그리고 곤충들을 농사일처럼 들여다보는 것이다.

책을 만들던 사람이 직접 쓴 책이라서 그런지 요즘 많이 쏟아지는 귀농생활 글들과 생태적인 생활 글 책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책이다. 농사일에서 만나는 풀꽃과 풀벌레라는 주제가 그렇다. 그래서 책의 원 제목도 <주말농사에서 만난 풀꽃세상 초록에 물들다>이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주섬주섬 농장 일을 정리하고 뜰에 내려 비치는 평온하고 아늑한 햇살을 뒤에 남겨둔 채 서울로 향해야 하는 주말농사꾼 이수경의 심정은 뭉클 가슴을 적시는 초승달과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꽃냄새를 실어 나르는 봄바람, 청량한 밤공기가 떠올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순간처럼 된다.
하지만 짐을 싸가지고 시골로 내려오기에 현실적인 고충은 여전하다. 귀농과 전원생활을 꿈꾸면서도 현실에 긴박되어 있는 모든 이들의 심경이 이럴 것이다.

....역시 인형눈알 붙이기 같은 농사일로는 저축하며 살기 힘들 것 같다. 지금은 그럭저럭 지낼 만하겠지만 나이 들어 눈이 침침해지면 교정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고 관절염이 생기면 작은 텃밭 가꾸는 것도 점점 버거워질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늘그막에 병이라도 얻게 된다면 그 대책이 막연하다. ....(중략) .. 친구와 자주 만날 수 없는 것도 고민이고...

어쨌든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소개되는 이 젊은 처자가 주말마다 농장으로 달려가 농사를 짓는 열정과 힘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반가울 따름이다.

귀농을 하거나 주말농장을 해 볼 사람만이 아니라 잠시 평소 생활에서 벗어나 푸른 들판으로 나들이 하듯 펼쳐 보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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