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흡혈귀전 : 흡혈귀 감별사의 탄생 조선 흡혈귀전 1
설흔 지음, 고상미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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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일상에 특별한 두근거림을 선사하는 공포라는 장르는 언제나 즐거운 놀이터다. 무서운 사건이 주는 짜릿함 속에서 현실의 스트레스를 잊어버리는 순간은 더 없이 매력적이다. 문제라면, 이 매력적인 놀이터가 대체로 어른들에게만 개방되어 있다는 점이다. 영상매체뿐만 아니라 동화에서도 어린이에게 공포는 잘 허락되지 않는다. 이 흥미로운 놀이터에서 어른들끼리만 즐겁게 뛰어놀고 어린이에게 개방하지 않는 이유는 어린이들의 독서 활동을 놀이의 장보다는 배움의 장으로 여기기 때문일 거다. 녹록치 않은 현실 속에서 어린이들에게 다정함을 가르쳐주기란 쉽지 않고, 책을 통해서나마 배려와 따뜻한 세계를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허나 독서또한 본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취미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방적으로 자극을 흡수하게 되는 영상매체(유튜브, 애니메이션 등)와 관련된 취미와 다르게, 독서 또한 수영이나 피아노처럼 즐기는 과정에서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쌍방향적인 취미라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독서에도 즐거움이 필요하다. 때로는 과감하게 으스스하고 두근거리는 놀이기구를 설치하고 어린이들을 불러 모아 책도 다른 놀이 만만치 않게 가슴이 뛰고 즐거운 취미라는 걸 알려줘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어린이 독자를 책이라는 놀이로 끌어들이기 위해 매력적이고 공포스러운 놀이기구를 설계하는 일이 남았다. 하지만 이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실제 놀이기구가 더욱 안전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너무 시시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심도 깊게 고민되어 만들어지듯이 동화에서도 어떻게 하면 어린이들에게 탈 만한 놀이기구를 제공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몸에 전율이 일만큼 인상적이면서도 안전한 놀이기구. 동화에서 지켜져야 하는 안전이란 아무리 무섭고 험난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선한 사람은 행복해지고 악한 사람은 불행해지며 다정함은 서로를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목소리를 유지함으로써 어린이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독려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점일 거다. ‘공포라는 가장 폭력적인 장르에서 다정함에 대한 메시지를 잃지 말라니 참으로 어려운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고민이 어렵다 보니 대부분의 작가는 오래전부터 검증된 학교 7대 불가사의도시 전설등 의 소재를 반복하며 다시 설치하는데 몰두해왔다. 성인들이 즐기는 공포물이 변주하고 성장하며 더욱더 흥미로워지는데 반해, 어린이들에게는 지금의 어른들이 어릴 때 타고 놀다 질려버린 오래된 놀이기구를 여전히 물려주고 있다니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난감한 상황 속에 조선 흡혈귀전은 과감하게 새로운 놀이기구를 설계하는 일에 착수했다.


 

대부분의 어린이 공포 문학이 괴이한 형상의 귀신이나 괴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어린이들에게 시각적인 공포를 일으키려고 했다면, 조선 흡혈귀전은 고기를 좋아한다고 알려진 세종대왕의 일화를 재해석해 괴이하고 검붉은 고기로 인해 꺼림칙한 사건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미각촉각등의 오감을 통해 공포를 일으키는 색다른 시도에 도전한다. 이 시도는 상당히 탁월하게 다가오는데, 활자 매체인 동화에서 시각적 공포를 자극하려 애쓴다 하더라 한껏 발달한 유튜브, 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영상매체에가 보여주는 괴이한 광경에는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런 영상매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통해 공포스러운 장면을 만들어내도 피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냄새나 기이한 물체로부터 느껴지는 꺼림칙한 촉감을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문장은 생생한 묘사를 통해 이를 전달할 수 있다. 조선 흡혈귀전는 이렇듯, 책이 가장 잘 선사할 수 있는 재미를 찾아내 어린이에게 펼쳐 보인다.

이미 널리 알려진 괴담을 되풀이하지 않고 역사를 재해석한 소재 또한 새롭다. 이야기를 보여줄 때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기보다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일으켜 어린이 독자를 즐겁게 하는 데에 집중하면서도 역사적 소재를 통해 사건을 유쾌하게 해결함으로써 어린이 공포 문학이 필요로 하는 안전선을 지켜낸다.

앞으로 조선 흡혈귀전을 비롯해 많은 어른이 새로운 놀이기구의 설계에 착수해 어린이가 조금 위험을 감수하고 스릴을 즐길 수 있는 흥미로운 공포 동화라는 놀이터가 꾸준히 생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어린이들이 책이 놀이의 공간이라는 걸 다시금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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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편 스콜라 어린이문고 36
사토 마도카 지음, 이시야마 아즈사 그림,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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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편. 제목을 읽으면 정의의 히어로 같이 멋진 인물이 등장해서 나쁜 어린이를 단숨에 무찌른 뒤, 괴롭힘 받던 어린이를 구조해서 정의에 대한 교훈을 남겨 줄 것 같다. 하지만 작품이 보여주는 어린이들의 세계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정의의 편이 묘사하는 어린이들 세계는 어딘지 이상하다. 몇몇 아이들과 빠르게 친구 관계를 맺어 소위 그룹을 만들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하고, 혼자 책을 읽으면 유별나다고 모난 소리를 듣는다. 괴롭힘이 옳지 않다고 말하면 정의의 사도라고 놀림을 받기까지 한다. ‘정의의 사도가 험담으로 쓰이는 세계. 정의의 편이 보여주는 어린이의 세계는 이상하면서도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새 학기를 맞아 처음 교실에 발을 들였을 때, 친구를 사귀지 못해 괴롭힘을 당하면 어쩌나 하며 마음을 졸였던 경험이 성인과 어린이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 감정은 학창 시절에 그치지 않고 성인이 된 지금도 이어진다. 우리는 항상, 혼자라서 괴롭힘 받지 않을까 불안해 하며 있을 곳을 찾는다.

그렇다는 건 어린이들이 미숙해서, 마음이 여물지 않아서 어른들보다도 유별나게 나쁘다는 구는 게 아니라는 말이 된다. 어린이들을 탓하기 전에 떠올려야 할 게 있다. 어린이의 세계는 어른의 세계를 닮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결핍과 타인의 아픔을 놀림거리로 삼아서 누군가를 웃기고 웃는 개그 프로그램이 유행했었다. 우리가 함께 웃을 수 있다면 누군가의 아픔을 놀려도 된다고. 보편에서 벗어난 몸의 특징이 부끄러워할 만한 것이라고. 어른들은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며 어린이들에게 왜곡된 정의를 알려주어 왔다. 한참 늦었지만, 돌이킬 수 없기 전에 어린이들에게 말해 줘야 한다. 어른들의 세계가 잘못되었다는 걸.

 

정의롭지 않은 어른의 세계를 꾸준히 보면서 자라왔을 어린이들에게, ‘정의로워야 해’ ‘착하게 살아라라고 해봤자 어떤 어린이가 귀를 귀울 일까. 그래서 정의의 편은 조금 다른 방법을 선택한다.

 

정의의 편이 어린이에게 보여주는 건 길고 긴 실패의 이야기다. 자신을 괴롭히는 박서준을 말리지 못하고 끝내 정우를 골탕 먹이는 데 동조하는 호수. 아이들의 괴롭힘에 동조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친구를 돕지도 못하는 희지. 꿋꿋하게 옳은 선택을 하지만, 오히려 옳은 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따돌림 받는 정우. 정의의 편속 어린이들은 정말 정의를 지킬 수 있을까?

 

호수, 희지, 정우. 세 사람의 정의가 다른 아이들을 변화시켰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세 아이는 정의롭기를 선택한다. 호수와 희지가 흔들릴 때 힘을 발휘한 사람은 정우다. 누군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고집을 꺾지 않는 정우는 작품에서 가장 특이하게 여겨질 만한 아이다. 정우를 놀리는 다른 아이들 말마따나, 너무 올바르니까 특이한 아이.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런 아이들이 꼭 반에 한명씩 있고는 했다. 원래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다정하다. 반에 서준이처럼 아이들을 무안하게 하는 어린이가 한두 명씩 꾸준히 있는가 하면, 그때마다 정우 같이 용기를 내는 어린이들도 꾸준히 있었다. 단지, 그 어린이들은 정우만큼 씩씩하지 않아서, 반 친구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 금세 주눅 들어 정의를 포기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더 큰 용기를 내지 못했다고 탓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미 많이 봐 왔다. 특별한 초능력과 강한 힘을 가진 영화 속 성인 히어로들도 정의의 편이 되기를 그만두는 모습을. 그 대단한 히어로들도 영웅이 되기를 포기하는데 어린이들이 정의를 지키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럼에도, 분명. 지금 어디에선가 정의의 편이 되어보려고 애쓰고 상처 입는 다정한 어린이들이 있을 거다. 책 속에서 정의를 지켜보려다 넘어지고 속상해 하는 인물들을 만나며, 초능력이 아닌 마음과 말을 무기로 삼아 정의롭지 않은 세상과 싸워나갈 어린이들이 격려 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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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세탁해 드립니다 스콜라 어린이문고 29
원명희 지음, 서영아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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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날이 있다. 무심코 던진 말로 인해 상처받고, 상처 주게 되는 날. 누군가의 아픔을 외면해서 내가 아파지는 날. 일상에서 생기는 작고 불편한 감정들이 내 마음에 얼룩을 남긴다. 내가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던 이 작은 얼룩은 착실하게 크고 진해져서 어떻게 닦아야 할지 난감해지는 순간에 이르고는 한다. 옷에 남은 얼룩이라면 세제로 지우고 깨끗하게 세탁하면 그만일 테지만, 마음의 얼룩을 지울 방법이란 도통 떠올리기 어렵다.

 

마냥 천진난만한 세계에서 살 것 같은 어린이들에게도 각자의 얼룩이 있다. 어른들과 똑같이 다채로운 감정을 가진 한 명의 주체인 아이들의 내면에는 분노와 미움, 모나고 날카로운 부분이 존재한다. 자신의 모난 부분이 타인에게 향하지 않도록 잘 숨기기보다도 내버려 두는 편이 쉽기 때문에, 어른들도 어린이들도 대체로 서로를 조금씩 상처로 얼룩지게 하면서 산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마음의 얼룩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그 얼룩을 닦아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작은 할아버지형태가 그런 인물들이다.

 

상가에서 행복 세탁소를 운영하는 작은 할아버지는 옷의 세탁해 줄 뿐 아니라 대화와 위로를 통해 손님들이 가진 마음의 얼룩을 들여다본다. 집에서는 집착이 심한 엄마에게 시달리고, 학교에서는 괴롭힘을 당하며 마음에 얼룩이 잔뜩 물든 주인공 하늘이가 작은 할아버지를 의지하는 어쩌면 당연하다.

작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상실감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 하늘이는 작은 할아버지와 비슷하게 자신의 아픔을 알아보고 위로가 되어주려는 형태에게 쉽사리 곁을 내주지 못한다. 홀로 어려움을 견디는 사이 짙어져만 가던 하늘이의 얼룩은 끝내 정체 모를 악취를 풍기는 지경에 이른다.

 

무엇이든 세탁해 드립니다는 도저히 지울 수 없을 것만 같은 하늘이의 깊은 얼룩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늘이의 아픔을 말끔히 세탁해줄 것만 같던 행복 세탁소라는 판타지적 장소는 뜻 밖에도,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무엇이든 세탁해 드립니다은 마음의 얼룩이 마법으로 지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주스를 쏟았을 때는 소금물, 케첩 얼룩은 식초로. 얼룩이 생긴 이유에 따라 세탁하는 방법이 다르듯이, 내 마음의 얼룩이 어떻게 해야 빠질 수 있는지는 자기 자신만이 찾을 수 있다. ‘행복 세탁소는 하늘이가 내면의 갈등과 대면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뿐 아이들의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 지난한 갈등과 굴곡을 넘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하늘이는 겨우겨우 자신의 얼룩을 닦는다. 자신의 마음과 마주보고도 쉽게 정의로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하늘이의 모습은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실제 우리도, 어린이도 더 정의롭고 불편한 선택지를 고르기란 쉽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현실적이다.

 

어린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상상하고 귀여워하는 건 간단하지만, 모난 부분을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가장 불편한 모습을 재현해 내는 무엇이든 세탁해 드립니다는 말한다. 스스로 마음의 얼룩을 들여다보는 일이 어렵다는 걸 알아. 그 어려움을 넘어서 얼룩을 세탁해 보려는 너희를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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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좀 하는 이유나 노란 잠수함 5
류재향 지음, 이덕화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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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건 동화에서 가장 다루기 난처한 소재다.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이 세상의 따뜻한 부분을 배우기를 바라는 동화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욕을 하지 말자라는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지만, 그 메시지를 강조하면 너무나 교훈적인 책이 되어버려서 어린이 독자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렇다고 욕하고 싶은 어린이의 욕망에만 집중하면 독자가 욕이 주는 자극에만 집중하게 돼서 이야기의 서사와 메시지가 상대적으로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아동의 에 대한 이야기가 이토록 난감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이들의 욕설에 대해 들여다봐야 할 지점을 어른들이 착각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원인을 찾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욕이라는 언어의 문제성이 아닌 욕을 할 수밖에 없는 어린이들의 마음일 것이다. 욕 좀 하는 이유나네가 욕 좀 하는 이유나, 들어보자라고 중의적으로 읽히는 제목처럼 책 속의 어린이 인물들이 욕을 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 충실하다.

 

너 욕 좀 하지? 나한테 좀 가르쳐 줄 수 있어?” (8p, 소미의 대사)

 

욕 좀 하는 이유나는 욕을 하고 싶어 하는 모범생 소미가 주인공 유나에게 욕을 가르쳐달라는 이상한 의뢰를 하면서 시작된다. 여기서 주인공 유나도 독자도 궁금해진다. 너는 왜 욕을 하고 싶은데?

소미가 욕을 배우고 싶은 이유는 임태구라는 전학생 때문이다. 외국에서 살다 왔다는 임태구는 소미를 보면 영어로 된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한다. 그래서 소미도 임태구의 욕보다 더 힘이 세 언어를 찾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이야기의 악당이라고 할 수 있는 임태구에게도 사정이 있다. 전학 온 직후, 아이들 사이에서 겉돌던 임태구는 영어로 된 욕을 통해 관심을 받는다. 이후 자연스럽게 임태구에게 욕이란 자신의 존재를 상대에게 인식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책을 읽다 보면 매사 욕이 입은 유별난 아이로 보이는 주인공 유나도 주변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지 않기 때문에 욕을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어린이들은 연약한 자신을 보호하고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수단이 욕설이기 때문에 욕을 한다. 그리고 이런 방법을 가르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오빠, 할머니처럼 가까운 연장자다. 어린이 세계의 연장자들은 욕설을 통해 자신은 쉽게 힘을 얻으면서 정작 아이들에게는 욕을 하지 말라는 모순적인 요구를 한다. 심지어 욕설을 하지 않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하지만, 어린이들은 안다. 욕을 듣고 상처 입은 친구의 표정이 계속 떠오르니까, 욕을 하는 내가 싫어지니까. 우리에게는 더 나은 방법이 필요하다는 걸.


동화 속 어린이들은 전설의 검을 찾아 모험을 떠나듯이 욕설보다 힘이 강하고 자신을 보호할 새로운 수단을 찾아 나간다. 그 수단이란 유나가 국어사전을 통해 찾아낸 새로운 언어와 언어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아이들이 끝내 찾아낸 전설의 검은 말이 아닌 관계이다.

소미는 유나와의 유대감 덕분에 더 이상 임태구의 난폭한 말이 버겁게 여겨지지 않는다. 유나도 소미와 우정을 쌓는 사이에 욕설의 쓸모를 잃게 된다. 임태구 또한 유나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발휘할 더 나은 방법을 찾게 된다.

 

소미가 임태구의 욕보다 더 나은 욕을 찾고. 임태구의 영어 욕이 또래 사이에서 호응을 얻었던 이유는, 욕이 가진 힘에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서로가 비슷한 비속어를 한다면 언어가 가진 힘 또한 비슷해져 우위를 점하기 힘들어진다. 욕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너와 나의 시간이 쌓이고 친밀해질수록 단단해지는 관계의 힘은 한계 없이 강해진다.

 

떠올려 보면, 어린 시절. 나에게도 소미와 유나 같은 마음이 있었다. 나를 괴롭히는 애한테 당하고만 있고 싶지 않아서 험한 말을 연습했지만, 입에 붙지 않아 속상했던 때가. 또래들에게 지지 않고 싶어서 더 강하고 날카로운 욕설을 찾던 때가. 그토록 간절하게 힘이 센 언어를 찾아다녔던 나는 어느 순간 욕하기를 포기하게 되었다. 굳이 날카로운 말로 울타리를 치지 않아도, 나를 보호해줄 믿음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가장 자신을 보호하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을 어린이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며 어려움을 위로받고 욕이 아닌 다정함으로 서로를 보호하게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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