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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평점 :
스틸 라이프 STILL LIFE
정물은 대단히 상징적인 요소로만 보일 수 있으나 때로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히 놓여 있는 물건이 아니라 순간의 스토리이고 화가의 생활이며 남겨진 사상과 의지인 것이다.
역자 박상미는 '정물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물이 미술사 속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장르였고, 현대에 들어오며 가장 실험적인 장르가 되었기 때문이다. ... 나는 예술이 가진 의미 중 하나가 전복이라고 생각한다. 위치의 전복이고 가치의 전복이다. 가장 미천한 재료가 가장 고귀한 정신을 전달하기도 하고, 어설프다 생각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게 되고, 하찮게 여긴 소재에서 중요한 가치를 발견하기도 한다.' 11p
정물에 대한 좁은 시야가 트이는 문장이었다. 내게 그림이란 화풍을 살피거나 시대적인 특징(색감, 재료, 무늬)를 살피는 것에 그쳐왔다. 더 솔직해지자면 정물을 떠올렸을 때 그려지는 건 탁자 위에 놓인 과일 바구니일 뿐 그 이상도 아니었다. 정물화는 주의 깊게 들여다 볼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 정적인 장면을 그린 이의 화풍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 것. 그 전형적인 이미지가 '가장 미천한' 요소라고 생각했기에 별다른 의미가 있을까 싶었던 거다.
가이 대븐포트는 첫 장에서 '여름 과일 광주리'를 주제로 정물의 기원을 말하는데, 정물화에 대한 흥미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음식을 구하고 음식을 먹기까지'에는 '음식이 어딘가에 놓이는 시간'이 있다. 어떤 음식은 조리가 되고 새로운 맛과 모양으로 탁자에 놓이게 되는데, 그 과정(순간)을 캔버스에 담아낸 작업이 정물화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눈앞의 음식이 똑같은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문명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식사 전에 손과 식기를 깨끗하게 하고, 식탁 중앙에는 꽃장식을 놓고, 식사가 대화를 수반하는 사교 모임이 될 수 잇다는 생각들을 유지해 오노 것이다. 정물화는 그런 맥락에서 문명의 장으로서의 식탁을 지켜왔다.' 41p
이때 가이 대븐포트는 정물화의 기원을 이집트와 이스라엘를 통해 살펴보며, 특히 이스라엘의 아모스가 하나님의 계시에서 '여름 과일 광주리'를 언급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사실 이는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보여준다고 해석이 되었는데, 앞서 살핀 '전환'의 예시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정물은 하나님의 자애로움과 자연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동시에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상징하게 되었다.' 32p
다만 계절이 흘러 광주리는 다시금 여름 과일로 가득 채워질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므로.
2장에서는 셜록 홈즈의 실내를 시작으로 두상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이어진 3장에서는 '사과와 배'를 주제로 글을 풀어나갔다.
특히 3장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기존에 알던 작품들의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대표작 '아비뇽의 여인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오래 들어와 익숙한 작품이라 반가웠다. 이 작품에 대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의 회화 버전이라고 말한 것이 인상 깊었다! 이 책의 장점은 이런 부분에도 있는 듯하다. '정물'을 이야기하지만 보다 넓은 예술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
'우리는 이 그림이 위대한 전환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회화에 있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고 아폴리네르의 <알코올>이다. (중략) 우리가 때로 세련됨을 뒤로하고 정글의 북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다 병들고 말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131p
그런데 갑자기 '아비뇽의 여인들'이 왜?
알고 봤더니 그림의 아래에 사과와 배가 자리하고 있더랬다! 수업 중 배우면서도 피카소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 또는 얼굴, 자세 등의 형태 그러니까 큐비즘에 집중에서 살펴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피카소가 배와 사과를 그려왔던 역사를 살핀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반 고흐와 정물을 알아가는 내용이었다. 반 고흐는 정물화를 '시각적 일기'로 사용했다고 설명하는데, 대표적으로 고갱을 환영하기 위해 <해바라기>를 그린 사례가 있다. 때로는 정물화가 일기로 사용되기도 하고 .. 무궁무진한 정물화의 이야기.
특히 책을 통해 함께 살펴본 것은 <양파가 있는 정물>이었다. '질병과 건강의 기록'이라는데, 당시 반 고흐의 상황을 보면 면도칼로 그의 왼쪽 귀를 자른 사건 이후인 것이다. 신경 쇠약 상태였던 그는 귀 절단 사건에 대한 명상이자 사면을 뜻하며 작업을 진행한듯 보인다.
'양파는 라스파이의 가정 의료 안내서에서 권장하는 것처럼 회복기 환자를 위한 가장 저렴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이다. 올리브오일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그림을 식단을 더 잘하겠다는 약속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더 심오한 전환으로 읽을 것인가?' 153p
다만 남겨진 이 정물이 담긴 그림은 우리를 고민하게 만든다. '양파'가 환자를 위한 영양가 있는 음식이기 때문에!
이처럼 그림 속 정물의 상징, 그 의미를 눈치챈다면 그림을 더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을유서포터즈 활동으로,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