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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윤광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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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 을유문화사

 

언젠가 보았던 인상 깊은 문장이 있다. 소비를 하면 할수록 진짜 내 취향을 알 수 있다는 것. 과소비를 유도하는 말은 물론 아닐 테지만 모든 것이 가성비템으로 이뤄진 나에게는 꽤나 세상을 흔드는 문장이었다. 좋은 것보단 싼 것, 낯선 것보단 내 손에 익은 것들을 찾던 삶. 그래서 최근 몇 년간 나름대로 새로운 것들을 도전해보고 있다. 개중에는 도저히 나와 맞지 않아 쓰던 것으로 돌아간 책갈피와 볼펜이 있고 또는 발견의 맛을 찾아 재미를 느낀 봉지라면들과 책갈피, 커피가 있다. 나는 아직도 나를 배워가고 있다. 


(저자가 사진 작가면 좋은 점..)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은 그간 저자가 발견한 ‘나’ 모음집과 같다. 괜히 ‘윤광준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아닌 것 같은 것이 101개의 물건을 소개하는 모든 글에 저자가 있기 때문이다. 냅다 ‘이 물건 좋아요! 이런 특별함이 있답니다.’하며 들이미는 강매는 결단코 하지 않는다! 대신 윤광준을 먼저 내어놓는다. 마치 떡밥처럼. 저자의 사적인 이야기가 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큐레이션된 물건이 생활 속으로 들어와 있다. 그 물건들은 특별하지만 평범하기도 하다. 보석만큼 비싼 물을 선보이다가 금방 샘표 양조간장 701을 말하고, 산과 들을 쏘다니며 사진 찍는 직업 탓에 알게 된 아웃도어 재킷을 소개하다가도 누구나 아는 성심당 튀김소보로를 언급한다. 비싸고 예쁜 것이 아닌 나와 잘 맞는 물건이 ‘생활명품’이란 뜻이다. 제목의 낯선 단어가 와 닿는 글. 잘 쓴 글이란 이런 것이구나 생각한다. 


 



글을 잘 썼다고 하니 덧붙이는 말인데, 카피 센스가 대단한 사람같다! 101개의 챕터에 물건의 특징을 설명하는 문구가 함께 삽입되어 있는데 참 기가 막히다. 


지금 바로 여기에 앉아 / 강하고 가벼운 캠핑 의자 / 베른 액티브 체어
나의 작고 똑똑한 비서 / 기억을 찾아 주는 사무용품 / 쓰리엠 포스트-잇&홀더
언제 어디서나 유용지물 / 다용도 비상 공구의 제왕 / 레더맨


정말 많은데 몇 가지만 뽑아 보았다. 특히 ‘베른 액티브 체어’는 라임까지 맞춘 재치가 눈에 띈다. 브랜드 또는 제품명만 적혀 있었다면 그저 넘겨버렸을지 모를 목차 페이지를 다채롭게 구성했다. 요즘 모종의 이유로 짧은 카피 만들기에 지쳐 있는 나로선 그저 감탄만 …

 

책을 읽으며 주변을 자주 살폈다. 내가 입은 옷과 신고 있는 신발, 나의 잠자리, 책상, 서랍 속 이모저모… 아하! 난 생각보다 아기자기한 취향이 있구나. 분홍색을 좋아하는 것 같아. 재밌는 경험이었다. 이미 사용하고 있는 나만의 도구들이 또는 도구들의 세월과 형태가 라이프스타일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 나도 나만의 생활명품을 주제로 글을 써보겠다는 의욕이 생기며 생각만으로도 즐거워하는 중!

일상이 단조로워 지루하신 분, 내 취향을 찾고 싶은 분,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분들께 강력 추천!!
물론 해당 사항 없는 분들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재밌는 책이다.


-

 

물건조차 제 멋대로 선택하고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보고 놀랐다. 뭐가 좋고 아름다운지 몰라 생기는 일이다. 제게 좋은 것이 뭔지 아는 기 취향이다. 취향은 반복적 선택과 실수로 단단해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실수하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남의 선택과 경험을 열심히 참고한다. 

나의 취향으로 찾아낸 물건이 기대 이상의 효용성과 가치로 보답할 때 즐겁다. 남들은 모르는데 나만 아는 은밀한 쾌감이기도 하다.
일상의 시간을 풍요롭게 채우려는 태도가 라이프스타일의 바탕이다.

15p
 


* 해당 리뷰는 을유문화사 서포터즈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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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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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STILL LIFE

 

정물은 대단히 상징적인 요소로만 보일 수 있으나 때로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히 놓여 있는 물건이 아니라 순간의 스토리이고 화가의 생활이며 남겨진 사상과 의지인 것이다.

 


 

역자 박상미는 '정물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물이 미술사 속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장르였고, 현대에 들어오며 가장 실험적인 장르가 되었기 때문이다. ... 나는 예술이 가진 의미 중 하나가 전복이라고 생각한다. 위치의 전복이고 가치의 전복이다. 가장 미천한 재료가 가장 고귀한 정신을 전달하기도 하고, 어설프다 생각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게 되고, 하찮게 여긴 소재에서 중요한 가치를 발견하기도 한다.' 11p

 

정물에 대한 좁은 시야가 트이는 문장이었다. 내게 그림이란 화풍을 살피거나 시대적인 특징(색감, 재료, 무늬)를 살피는 것에 그쳐왔다. 더 솔직해지자면 정물을 떠올렸을 때 그려지는 건 탁자 위에 놓인 과일 바구니일 뿐 그 이상도 아니었다. 정물화는 주의 깊게 들여다 볼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 정적인 장면을 그린 이의 화풍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 것. 그 전형적인 이미지가 '가장 미천한' 요소라고 생각했기에 별다른 의미가 있을까 싶었던 거다.

 


 

가이 대븐포트는 첫 장에서 '여름 과일 광주리'를 주제로 정물의 기원을 말하는데, 정물화에 대한 흥미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음식을 구하고 음식을 먹기까지'에는 '음식이 어딘가에 놓이는 시간'이 있다. 어떤 음식은 조리가 되고 새로운 맛과 모양으로 탁자에 놓이게 되는데, 그 과정(순간)을 캔버스에 담아낸 작업이 정물화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눈앞의 음식이 똑같은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문명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식사 전에 손과 식기를 깨끗하게 하고, 식탁 중앙에는 꽃장식을 놓고, 식사가 대화를 수반하는 사교 모임이 될 수 잇다는 생각들을 유지해 오노 것이다. 정물화는 그런 맥락에서 문명의 장으로서의 식탁을 지켜왔다.' 41p

이때 가이 대븐포트는 정물화의 기원을 이집트와 이스라엘를 통해 살펴보며, 특히 이스라엘의 아모스가 하나님의 계시에서 '여름 과일 광주리'를 언급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사실 이는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보여준다고 해석이 되었는데, 앞서 살핀 '전환'의 예시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정물은 하나님의 자애로움과 자연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동시에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상징하게 되었다.' 32p

다만 계절이 흘러 광주리는 다시금 여름 과일로 가득 채워질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므로.

 


 

2장에서는 셜록 홈즈의 실내를 시작으로 두상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이어진 3장에서는 '사과와 배'를 주제로 글을 풀어나갔다.

특히 3장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기존에 알던 작품들의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대표작 '아비뇽의 여인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오래 들어와 익숙한 작품이라 반가웠다. 이 작품에 대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의 회화 버전이라고 말한 것이 인상 깊었다! 이 책의 장점은 이런 부분에도 있는 듯하다. '정물'을 이야기하지만 보다 넓은 예술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

'우리는 이 그림이 위대한 전환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회화에 있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고 아폴리네르의 <알코올>이다. (중략) 우리가 때로 세련됨을 뒤로하고 정글의 북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다 병들고 말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131p

그런데 갑자기 '아비뇽의 여인들'이 왜?

알고 봤더니 그림의 아래에 사과와 배가 자리하고 있더랬다! 수업 중 배우면서도 피카소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 또는 얼굴, 자세 등의 형태 그러니까 큐비즘에 집중에서 살펴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피카소가 배와 사과를 그려왔던 역사를 살핀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반 고흐와 정물을 알아가는 내용이었다. 반 고흐는 정물화를 '시각적 일기'로 사용했다고 설명하는데, 대표적으로 고갱을 환영하기 위해 <해바라기>를 그린 사례가 있다. 때로는 정물화가 일기로 사용되기도 하고 .. 무궁무진한 정물화의 이야기.

특히 책을 통해 함께 살펴본 것은 <양파가 있는 정물>이었다. '질병과 건강의 기록'이라는데, 당시 반 고흐의 상황을 보면 면도칼로 그의 왼쪽 귀를 자른 사건 이후인 것이다. 신경 쇠약 상태였던 그는 귀 절단 사건에 대한 명상이자 사면을 뜻하며 작업을 진행한듯 보인다.

 


 

'양파는 라스파이의 가정 의료 안내서에서 권장하는 것처럼 회복기 환자를 위한 가장 저렴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이다. 올리브오일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그림을 식단을 더 잘하겠다는 약속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더 심오한 전환으로 읽을 것인가?' 153p

 

다만 남겨진 이 정물이 담긴 그림은 우리를 고민하게 만든다. '양파'가 환자를 위한 영양가 있는 음식이기 때문에!

이처럼 그림 속 정물의 상징, 그 의미를 눈치챈다면 그림을 더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을유서포터즈 활동으로,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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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뤼아르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1
폴 엘뤼아르 지음, 조윤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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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뤼아르 시 선집 / 폴 엘뤼아르(저), 조윤경(역) / 을유문화사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작품들을 연도별로 순차적으로 나열한 시 선집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작가가 처한 환경과 그로 인해 변해가는 생각이 작품에 드러나는 흥미로운 구성을 띈다.


나는 '번역 시'라는 장르를 막연히 어렵다고 느껴왔던 부류였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시를 보면 구조와 단어의 의미를 분석하고 작가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데, 시를 감상하기 보다 문제를 풀기 위해 파헤치는 학창시절용 공부에 길들여졌던 게 컸던 것 같다.

그래서 폴뤼아르의 시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섣부른 걱정이었음을 알게 됐다!



책을 펴고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책날개에 기재된 폴 엘뤼아르의 생애이다. 가득 채울만큼 그의 일대기를 이야기 하는데, 시를 읽어나가면서 그럴 수 밖에 없던 구조를 이해하게 된다.


폴 엘뤼아르는 1910년도 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50년도까지 시를 써왔다. 시대별로 작품이 내포하는 큰 주제가 변화하는데, 그래서인지 사랑시와 저항시, 초현실주의 시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한 작가로 평가받기도 한다.

때문에 시집을 읽으며 엘뤼아르의 작품을 통해 그 시대 프랑스의 역사를 엿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특히 세게 1, 2차 대전을 겪으며 많은 이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던 저항시를 통해 강하게 다가왔다.

엘뤼아르의 사랑과 관심사(예술, 초현실주의)를 시를 통해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니, 한편으로는 시로 표현한 시인의 자서전 같기도 했다.




「자유」, 폴 엘뤼아르


엘뤼아르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자유」는 많은 이에게 영감을 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있다.

'~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라는 문장의 반복이 인상적인데, 시의 마지막에 그 이름(자유)을 밝힘으로써 고조되던 감정이 절정에 치닫는 경험을 준다.



「야간통행금지」, 폴 엘뤼아르


을유 서포터즈를 진행하며 좋은 기회로 조윤경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유념했던 것 중 하나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씀해준 게 기억에 남는다.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자유」처럼 이 시 역시 저항시로 알려져 있는데, 구절 사이 간격 차이를 보며 번역 과정에서 시를 담아내는 데 얼마나 신경쓰셨는지 느낄 수 있었다.



「모퉁이」, 폴 엘뤼아르


내게는 제목보다 전문이 더 익숙한 작품이었다. 양귀자의 소설 제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

놀라웠던 건 작품의 제목이 엘뤼아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그게 전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짧고 굵지만, 큰 울림을 주는 시다.

또 을유문화사의 엘뤼아르 시 선집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시의 원문이 함께 실려있음에 있다. 교수님과의 인터뷰 중 원문의 중요성을 들을 수 있었는데 낯선 언어에 대한 흥미와 시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위 시는 워낙 짧은 탓에 알아볼 수 없지만 엘뤼아르 시의 특징인 반복 덕분에 어떤 표현은 눈에 익을 것도 같다. (시로 프랑스어를 배울 수 있다?!)


「젊음이 젊음을 낳는다」, 폴 엘뤼아르


결코 많다고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지만 처한 환경이 크게 변하는 순간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어리다'에서 '젊은' 사람이 되고, 아주 오랜 시간 나를 소개하는 단어였던 학생을 내려놓은 지금. 새로운 수식어를 찾아 떠나야 하는데 둥지를 떠나 잠시 방황하다 보면 주변과 비교하며 더디게 발을 옮기는가 싶어 어렵기만 했고.

그런 순간에 만나 위로가 되어준 작품이 바로 이 시였다. '새벽은 모든 나이에 찾아오'며, '용기로 빛나는 문은 모든 나이에 열려 있'으니 주저하지 말라 말하는 엘뤼아르. 좋은 시는 나 자신에 대한 희망을 손에 쥐어준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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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구아 비바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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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구아 비바 Agua Viva

 

기승전결이 없는 소설. 줄거리가 없는 소설. 낯설고 기이하고, 파괴적인 그러나 홀린 듯 읽게 되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아구아 비바>는 '살아 있는 물'이라는 의미의 제목처럼 형태가 없다. 완전히 분해되지 않으나 하나로 잡히지도 않는 물덩어리 같다.

앞서 기승전결이 없다고 소개했는데, 정말이지 그렇다. 이야기의 흐름을 좇고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려 할수록 어렵게 다가온다.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끙 앓고 있으면 리스펙토르는 그런 나를 눈치채고 알려준다. 이 글은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저 읽으라고. 

 


소설에서 '나(화자)'의 마음을 듣는 일은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직설적으로 감정을 언급하거나 에둘러 묘사되는 등 독자로 하여금 인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런데 <아구아 비바>만큼 정리되지 않은 날 것의 민낯을 본 적이 있던가? 어지럽고 두렵다. 무엇을 목적에 둔 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끝내 말을 이어가고 우리는 그저 따라갈 뿐이다. 

 

 

무작정 따라 읽다보면 마주치는 깨달음이 있다. 계속해서 강조되는 지금과 순간에 대하여.

너무 먼 미래를 그리다 보면 알 수 없는 허탈감에 무력해지곤 한다. 보장되지 않은 그 길을 감히 걸을 수 있나 싶은 의문도 들고. 나에 대한 확신이 옅어져가는 걸 느낄 때 '오늘을 창조'하라는 말이 와닿았다. 미래는 미래지만 또한 지금이다. 나는 매순간 미래인 지금을 살고 있다. 오늘 이 순간을 잘 다듬고 만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그곳에 있을 것이다.

 


 

목표한 바를 손에 쥐는 삶을 꿈꿨다. 그것을 이루면 다음 목표를 위한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쉼없이 달리고 부담에 발이 무거워져도 애써 들어 올리는 것. 그것이 행복한 삶인가. 문득 겁이 난다. 실패 앞에 무너져 내릴까. 몸보다 지쳐버린 마음이 다음을 원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무엇을 위해 걸어야 하는 걸까.

꿈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라고 믿어왔다. 그렇게 들었고 배워왔으며 많은 사람이 또한 실행하며 따랐다.

그러나 리스펙토르는 '그저 살아 갈'것이라 말한다. 모든 임무를 거부한 채 그저 살아가겠다고.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 채 나만을 믿고 가보는 것. 때로는 힘들고 포기하지만 다시금 일어나 걷는다. 조금 기다리면 어떤가.

 

 

 

 

책을 읽는동안 글을 쓰는 리스펙토르를 떠올렸다. 문단들은 연결되지 않고 때로는 두려움에 쉬었다 흐르기도 하며 그럼에도 분명한 몰입이 담긴 글. 리스펙토르의 몰입의 순간을 지켜보고 싶지만 오히려 그 순간이 글로 우리 곁에 남은 것 같다. 살아 있음으로 뭉쳐진 순간을 붙잡는 글. 

짧은 분량임에도 임팩트는 컸다. 흔들리고 위태로운 순간에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게 되지 않을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음에 집중하며.

당신은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들을 뿐, 그러니 당신의 온몸으로 나를 들어라. - P13

그러니, 읽으라, 내가 지어낸 이야기는 졸졸 흐르는 음절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은 순수한 진동이다. - P15

미래를 맞이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늘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미래가 되고, 모든 시간은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된다. - P17

우리들 각자의 삶에서 뭔가를 잃어버린 순간에―그때 우리가 완수해야 할 임무가 공개되는가? 하지만 나는 어떤 임무도 거부한다. 나는 아무것도 완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살 것이다. - P117

지금 내가 당신에게 글을 쓰면서 진짜로 하고 있는 건 이런 것이다: 나 자신을 따라가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스스로를 따라가기. 가끔은 그게 무척 힘들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의 성운에 불과한 것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포기하고 만다. - P106

간단해, 나는 나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다. 그것은 드넓고, 그리고 지속될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쓰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그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계속될 것이다.

나를 보고 나를 사랑하라. 아니: 당신은 당신 자신을 보고 당신 자신을 사랑한다. 그렇지.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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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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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강의 중 건축과 관련된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건축학이나 기초 이론이 아니라 흥미로운 건축 몇 가지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쳤던 터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타워, 시대별 성당의 특징 따위를 열심히 외웠다. 학점 따기 위해 강제로 암기된 건축들은 시험지를 제출함과 동시에 휘발된 듯 떠오르는 내용이 없었다. 내게 남은 건 건축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 뿐! 그래서 아쉬웠다. 시험이라는 목표 지점을 빼고 배웠다면 어땠을까? 건축가의 배경과 사상을, 시대적 상황을, 건축물의 역할에 대한 배려를 살필 수 있었다면 그렇게 이해했다면 더 풍부하고 흥미로웠을 텐데.

이러한 이유로 을유 서포터즈 첫 활동 도서로 이 책을 만날 수 있어 더 반가웠다.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은 건축가이자 교수인 저자 '유현준'이 영감 받았던 건물들 중 30개를 선정해 소개하는 책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인문에 초점 맞춰진 덕분에 비전공자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다. 새롭고 창조적인 건축물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넘어 그 작품들의 매력을 옳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지식과 더불어 저자의 배경, 사상 등을 함께 안내해주기에 푹 빠져들기에 거리낌이 없다.



건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 르 코르뷔지에.

인간을 위한 건축을 내세우며, 집을 살기 위한 기계로 바라봤던 건축가.


나는 언젠가부터 르 코르뷔지에 이름 뒤로 '아파트'를 겹쳐 보았던 것 같다. 어디서 주워들은 얕은 지식이 탄로나는 것만 같았던 순간. 이래서 무지한 인간이 무섭다 했던가.

이 책에서는 유난히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이 많이 등장한다. 그만큼 인정받는 건축가이며, 실제로 놀랍고 기발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건축 디자인의 획일화에 한 몫 했다고 생각한 건 그가 혁신적인 재료 '콘크리트'를 활용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하지만 위 이미지 속 저자의 표현에서 이 어리석은 착각은 부서지고 만다. '콘크리트로 공간의 교향곡'을 만들었다는 비유가 감히 예술적이고 아름답다.



흥미로운 재료나 디자인의 건축물들이 많았다. 빛이 투과되는 대리석 벽이 있는 '바이네케 고문서 도서관'이나 건축 시 사용했던 통나무를 태워 제거했던 '브루더 클라우스 필드 채플', 발전과 발전을 거듭해 컴퓨터 기술이 도입됐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까지. 뿐만 아니라 이름만 대면 떠오를 정도로 유명한 작품들(루브르 유리 피라미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까지 속에 든 이야기들을 알고 보니 더 경이롭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그만큼 구석구석 인덱스가 붙지 않은 건축물이 없지만 만약 그 중 가장 마음에 남은 건축물을 하나 꼽으라면 '독일 국회의사당'이라 말하겠다.

국민을 생각하는 나라, 국민이 주인임을 건축물을 통해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던 연속이었던 작품으로, 독일의 국가적 건물을 영국 출신의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건축했다는 사실부터 놀라웠다. 노먼 포스터는 그만큼 의미있는 행보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는데, 과거 소련군이 남겼던 낙서를 역사의 일부로 보고 덮지 않았다는 점에서 와닿았다.

단연 눈에 띄는 공간은 돔 전망대다. 건물의 가장 상단에 위치한 돔을 국민이 들어갈 수 있는 전망대로 만들어 도시를 내려다 볼 수 있게 해 주인의식을 높였다고 볼 수 있다. 전망대가 주는 권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 전망대에 선 순간 발 아래 국회의 회의장이 놓인다는 점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거다. 국회의원은 국민보다 아랫사람이다.


책을 읽는 동안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직접 방문했던 건축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건축물에 문외했음에도 전신을 감쌌던 어떤 벅찬 감동이 있다고. 그런데 이걸 알고 보면 어떻겠니. 그래서 수없이 약속해버렸다. 너무 늦지 않게 멋진 건축물 하나는 보러 가자고.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전에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 사람들의 흔적이다. 별생각 없이 조상이 하던 대로 따라 짓던 건축가가 아닌, 수백 년 된 전통을 뒤집거나 비트는 혁명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 P9

르 코르뷔지에 하면 콘크리트 건물을 유행시켜 건축을 망가뜨린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분도 많다. (중략) 대신 공간이 하도 다채롭고 새로워서 콘크리트로 공간의 교향곡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 P28

건축은 그 나라의 국격을 보여준다. 건축은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보여준다. 건축은 그 나라 국민의 성숙도도 보여준다. 독일 국민은 영국에 대한 열등감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P139

건축의 묘미는 경험하는 자의 신체의 크기, 과거의 경험, 무의식 등에 의해서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런 면에서 건축 공간은 자세하게 설명된 소설이라기보다는 읽는 자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시와 더 비슷하다. - P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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