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재 동문선 현대신서 41
아티크 라히미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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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쟁 중인 나라에 살고 있지만 정작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흙과 재>의 배경이 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지식도 전무하다. 때문이 이 소설의 리뷰를 쓰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알지 못하는 것을 더듬어 유추해내어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외국 친구들에게서 얻은 간접적인 전쟁의 체험들을 이 책에서 느낀 것들과 엮어볼 수 있을 것 같다. <흙과 재>를 집필한 아티크 라히미는 전쟁을 피해 아프가니스탄을 벗어나 프랑스로 망명한 이민자 가운데 하나다. 내 친구들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이민자들이 몇몇 있었다.

 

 

 

 

호주에 갔을 때 제일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70세 스리랑카 할아버지 라자와 30대 중반의 팔레스타인 아저씨 아담이었다. 두 사람 모두 내전을 피해 나라 바깥에서 사는 이민자였다. 라자는, 딸은 영국에, 아들은 호주에, 다른 딸은 또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영국에 있었으며 자신은 손자를 봐주며 호주 이민을 준비하는 중이라 했다. 그는 전쟁에 관해 말을 많이 아꼈다. 라자는 자신의 아픔을 표현할 수 없었고, 나는 가족이 떨어져 사는 아픔을 위로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내전 때문에 가족이 뿔뿔히 흩어져 사는 거냐는 물음에 말 없이 고개만 까닥였을 뿐이었다.

 

전쟁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땅은 팔레스타인도 마찬가지다. 아담 역시 그러한 아픔을 안고 살고 있었다. 아담과 함께 있는데, 여동생이 팔레스타인 시내에 나갔다가 군인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밤새 어딘가에 전화해서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고, 분노로 가득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다는 상황이 이해하기 힘들어, 아담의 친구인 또 다른 팔레스타인에게 길을 걷다가 총에 맞아 죽는 일이 자주 있는지 넌지시 물었다. 그 친구는 차를 몰고 가다가 군인이 총을 들고 다가와 쏘려고 해 "나는 팔레스타인 사람이 아니다. 나는 호주 시민이다"라고 외쳐 살아남은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는 친구의 말에 또다른 충격을 받았다. 죽음이 일상인 것처럼 들리는 그들의 말은 마치 농담 같았다.

 

아침에 웃으며 헤어졌던 가족이 저녁에 죽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상인 생활을 어떻게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까. 아담과 라자처럼 삶이 조금은 윤택한 자들은 이민이라는 길을 선택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신의 가호를 바라며 살던 땅에 발 붙이고 있을 수밖에 없다.

 

<흙과 재>에 나오는 인물들도 전쟁으로 인해 갑자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다. 아내와 며느리가 화염에 휩싸여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할아버지, 깊은 탄광 속에 들어가 석탄을 캐느라 죽음이 비켜간 아들, 전쟁의 거대한 폭발음으로 인해 청력을 상실한 어린 손자. 할아버지는 손자를 데리고 죽음이 휩쓸고 간 고향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아들에게 가는 길이다. 탄광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고, 할아버지와 손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총칼은 가족의 소통을 단절시킨다. 손자는 자신이 청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군인들이 사람들의 목소리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자신들이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이유로 전쟁이 일어난 것이든, 마을을 점령한 자가 민병대든, 소련군이든, 심지어 그것이 정의든 불의든,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의 눈에는 모두가 그저 가족의 목숨을 빼앗는 얼굴 없는 존재들일 뿐이다.

 

 

 "어르신, 지금은 죽은 자들이 살아 있는 이들보다 더 복되고 행복한 때이지요. 어쩌겠습니까! 험한 시대를 만난 겁니다. 우린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을 잃어버렸어요. 권력이 인간의 신앙이 되었지요. 신앙이 우리의 힘이 되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이제 인간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존엄성을 간직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용기 있는 사람도 없고 말입니다."

 

 

여기서 할아버지는 아프가니스탄의 과거를, 아들은 현재를, 손자는 미래를 상징한다. 소설이 묘사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은 암울하다. 과거를 상징하는 할아버지의 고향은 아프가니스탄의 전통과 함께 폐허로 변했다. 현재를 상징하는 아들은 탄광이라는 깊고 깊은 어둠속에 갇혀 과거도 미래도 만날 수 없는 고립된 상태다. 미래를 상징하는 손자는 그 어떤 사실도 들을 수 없게 되었고, 곧 말하는 법조차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희망의 매개체로 읽히는 사과는 먼지로 가득하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손자에게 건네주기 위해 깨끗하게 닦으려 노력하지만, 아무리 닦아도 자꾸 먼지가 앉는다. 위로로 읽히는 안정제 나스와르는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가득한 할아버지에게 결코 안정을 주지 못한다. 신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 희망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눈에서는 자꾸 눈물이 나오고 입에서는 계속 거친 말이 쏟아져 나온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슬픔이 나를 잠식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어르신도 아시겠지만, 때때로 고통은 녹아내려서 우리의 눈으로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말이 되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기도 하지요. 아니면 우리 안에서 폭탄으로 변해 어느 날 갑작스러운 폭발로 우리를 파열시키기도 하고 말입니다."

 

 

소설에는 아프가니스탄이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그 배경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다. 또한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어설픈 희망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담담히 보여준다. 책에서는 "전쟁과 희생은 같은 논리다. 설명이란 게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전쟁에는 원인도 결과도 없고, 다만 소위 말하는 행위란 것만 있다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작가가 배경을 생략하고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는 소설을 쓴 이유라고 생각이 든다. 그는 전쟁의 민낯만을 이야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이념과 경제 논리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은 인간의 뿌리까지 파괴한다. 존중과 존엄이 사라지고 폭력과 권력이 난무한다. 서로의 논리가 정의라며 상대를 공격한다. 그러나 어떤 논리로 전쟁을 미화시킨다 해도 모든 피해는 전쟁의 정당성을 외치는 사람들이 아닌 그 전쟁이 일어나는 땅의 사람들이 입는다.

 

그 거대한 비인간성 앞에 선 나약한 존재들에게 난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라자와 아담 앞에서 그들을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했던 것처럼, 이 책의 주인공들에게도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식의 위로를 건네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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