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지식인의 책무'라는 말을 흔히 접한다. 여기서 책무란 그 어떤 이익이나 권력에 편승하지 않고, 다수의 정의와 세상의 진실 편에 서며, 자신의 목소리를 감추지 않는 것이라 할 것이다. 하워드 진은 지식인의 책무를 가장 충실하게 이행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그가 그간 정의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자서전 형식으로 보여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그의 목소리는, "침묵은 금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아무리 두려워도, 길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해도,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실천해야만 그것이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작은 행동들이 보다 큰 행동을 위한 길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듯,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그렇게 시나브로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초석이 되었다.

 

 

"때로 침묵은 거짓말이다."

 

"스펠먼에서 내가 배운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침묵을 용인으로 혼동하기 쉽다는 점이다."

 

"책을 읽고, 한 사람을 만나고, 한 순간의 경험을 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삶이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아무리 작은 행동이라도 간단히 무시하거나 제쳐두어서는 안 된다."

 

"나는 학생들이 내 수업을 통해 더 많은 지식을 얻는 것만이 아니라, 안정된 침묵을 버리고 목소리를 높여 발언하고 불의를 볼 때마다 그에 맞서 행동하게 되기를 바랬다."

 

"훌륭한 교육은 책을 통한 가르침과 사회적 행동 참여를 결합시키는 것이며, 그 둘은 서로서로를 풍부하게 만든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무언가를 행동에 옮겨야 한다."

 

그의 행동은 1950년대 흑인들의 비폭력 저항운동에서 시작해 미국의 베트남 전쟁 반대, 민권운동, 여성운동, 환경파괴, 중앙 아메리카 농민 보호, 보스턴 대학 총장의 탄압 반대, 노동운동까지 이어진다. 그의 정의를 향한 행동은 저명한 인지도로 할 수 있는 대중강연, 언론 기고부터, 벌금 내지 않고 감옥에 들어가기, 흑인들과 함께한 '앉아 있기 운동(흑인 해방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흑인과 백인의 자리가 따로 있었다)', 가두시위 등 다채롭다. 그는 이를 '비폭력 직접행동'이라 명한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과 비슷한 맥락이다. 한때 전쟁에 폭격수로 참여해 3만 피트 상공에서 민간인에게 포를 썼던 그는, 인간성을 상실한 잔학행위 앞에 어떤 전쟁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폭력도 전쟁과 마찬가지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 그의 비폭력이 수동적이거나 방관적이라 생각되지 않는 지점은 다음 대목에서 분명하게 나온다. 그는 폭력이 난무하는 남부의 민권운동 앞에 비폭력 직접행동으로 저항하는 마틴 루터 킹과 SNCC를 보고 매료된다.

 

"단순히 수동적인 비폭력이 아니고, 또 분명 굴복이나 용인, 유화가 아닌, 폭력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려는 결단 아래 이루어지는 행동, 저항, 참여."

 

그의 행동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민불복종'이다. . 하워드 진은, "인류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대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라 말한다. 정부가 대의에서 어긋나고 있다면 법을 어겨서라도 그에 맞서야 한다. 그는 가장 큰 위험은 '시민의 복종'이라 말한다. 개인의 양심을 정부의 권위에 굴복시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야기한다. "그러한 복종은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본 것처럼 공포를 낳고,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이른바 민주적 정부의 자의적 결정 아래 국민 대중이 전쟁을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는다." 광화문 광장 앞에서 촛불을 들고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비폭력 직접행동'과 '시민불복종'을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정부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이야말로 민주사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그것을 부당한 정부를 비판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함께 촛불을 들고 서는 것만으로도, "정부의 강력한 힘 앞에서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낄 때에도, 그러한 느낌조차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라는 생각"을 서로에게 전할 수 있다. 역사는 대규모 사건이나 일대 변혁과 같은 것이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러한 거대한 운동을 이끌어낸 수많이 많은 작은 행동들이 이끌어온 것이다. 우리의 촛불 하나하나가 그 작은 행동들의 증거다.

 

"우리 정부를 비판하는 게 반미고 친공산주의라면 제 생각에 우리 모두가 유죄입니다."

 

"역사는 여러모로 편리하다. 만약 당신이 어제 태어나서 과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면, 정부가 하는 말을 무엇이든 쉽게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것이 정부가 주어진 사례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절대적으로 입증하지는 않더라도) 의심을 품을 수 있고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며 진신을 알게 될 가능성은 더욱 커지게 된다."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결코 그 어떤 상황도 긍정적이지 않았는데,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다. 그 모든 것이 결국에는 좋은 쪽으로 나아가리라는 확신 말이다. 그는 인간의 힘을 믿는다.

 

"이 나라는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어마어마한 부와 나란히 존재하는 빈곤, 흑인들에 대한 끔찍한 처우만이 아니라 그 뿌리부터 썩었다는 사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대통령이나 새로운 법률이 아니라, 낡은 질서의 근절과(합리적이며 평화롭고 평등한)새로운 사회의 도입을 필요로 했다. 나는 우리의 삶이 다른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고, 우리의 머리가 다른 사고방식을 채택할 수 있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단지 심사숙고하는가, 아니면 무언가 행동을 하는가에 따라 이러한 믿음은 섬뜩한 것일 수도, 유쾌한 것일 수도 있다."

 

역사는 늘 후퇴하는 듯한 순간에도 긍정적으로 변화되어 왔다. 우리는 장기적인 변화를 만드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우리 모두의 숙제다. 앞서 '지식인의 책무'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흔히 우리는 '책무'라는 단어에 신경쓰느라 '지식인'이 누구인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지식인'은 특정 대학의 교수나 학교 선생, 책을 쓴 저자 등의 특별한 직업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인의 사전적 표현은 "다양한 개념에 대한 연구, 노동, 질문 및 응답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쓰고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의견을 나누며 토론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지식인이다. 보통 학교의 교육을 받았고, 다양한 개념에 대해 사고하는 우리 모두는 지식인이며, 지식인으로서 정의와 세상에 대해 목소리를 낼 책무가 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라는 비관주의는 또다른 비관주의를 낳을 뿐이다. 우리는 하워드 진은 마지막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만약 최악의 것들만을 본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파괴할 것이다. 사람들이 훌륭하게 행동한 시대와 장소들(이러한 사례들은 무수히 많다)을 기억한다면, 행동할 수 있는 에너지, 그리고 적어도 이 팽이 같은 세계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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