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거릿 애트우드의 <배경이 카우보이를 알려 준다(Backdrop Addresses Cowboy)>를 인상적으로 읽었다.
시에서 카우보이의 순진한 상태와 총알 가득 채우는 행위가 같이 있는데, 그건 다음 연의 정의로운 눈과 연결된다. 건달들을 해치우는 일은 영웅적인 절망의 흔적을 남긴다. 카우보이는 영웅적인 행위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뒤에 남아 있는 사람은 절망을 느낀다. 더 정확히는 그를 영웅이라 칭송하는 것과 절망을 느끼는 것이 혼재한다. 다른 곳에 있는 ‘나’. ‘나’는 당신이 건너려 애쓰는 경계선 너머에 있기에 (즉 당신은 나에게로 오기를 원한다.) ‘나’는 이상적인 가치 또는 이상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을테지만 나는 당신 때문에 부서졌다. 나는 당신이 지나가며 훼손한 공간이라고 슬프게 고백한다. 나는 나를 향해 다가오는 당신을 보지만 사실 나는 당신이 지나간 뒤에 있는 것이다. 시선이 전환되며 슬픔은 극대화된다.
위안부 문제에 의견을 낸 연세대 교수를 응징한다고 연구실에 쳐들어가 교수를 폭행하고, 그 상황을 인터넷으로 송출한 인간이 있다. 또 어떤 인간은 무슨 연구소네 하는 간판을 달고, 유튜브에서 오만가지 루머를 퍼트리며 가시가 박힌 말로 유명인의 인격을 훼손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기자라고 주장하고 자유, 정의같은 숭고한 가치를 부르짖지만 이들의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는 분노와 슬픔만 남을 뿐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폭력을 기꺼이 행사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자들은 아주 끔찍한 종자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가 무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