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자들의 은밀한 매력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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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시인이 사람들과 모여서 공동으로 시를 쓴 걸 본 적이 있는데, 공동의 시란 이런 것이었다. 시인이 종이에 아무 문장이나 써서 상자에 넣고, 다른 사람이 다른 종이에 역시 아무 문장이나 써서 같은 상자에 넣고,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각각 문장을 써서 종이를 상자에 넣는다. 상자에서 종이를 꺼내 적힌 글을 칠판 위에서부터 하나씩 적는다. 문장은 상자 밖을 나와서 쌓였다. 이어진 문장은 말이 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말이 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시라고 불렀다.


이게 시인가? 시는 논리적으로 정교하게 구성된 결과물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건 시가 아니다. 문보영 시인은 공동의 시를 통해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시가 그러한 것이라면, 계획을 세우지 말고, 무의식과 우연이 이끄는 대로, 시가 스스로 만들어지도록 하는 건 어떤가. 그것이 우리의 무의식을 발견하게 하고 틀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면 그것을 시라 부르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문보영 시인의 작업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운동과 같다.


“그들은 초현실주의 철학의 기본 규칙을 따르고 있었다. 분석하지 말고, 계획을 세우지 말고, 오로지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그리는 것이다. 가장 어둡고 가장 비합리적인 생각이 무의식에서 솟구쳐 나와서 캔버스에 자신을 드러내도록 하라. 자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림이 스스로 그려지도록 하라...(중략)...초현실주의 작품은 마음의 더 깊숙한 곳을 건드리기에, 훨씬 더 강력한 목소리로 관람자에게 직접 말할 수 있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모두 동일한 희망과 두려움, 동일한 증오와 사랑과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p18-19


100년 전에 있었던 운동을 행하는 시인이 있고, 100년 전에 있었던 운동을 조망하여 책을 낸  데즈먼드 모리스가 있다. 이 모든 것을 떠올리며 흥미를 느끼는 내가 있다. 초현실주의자 선언은 지금도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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