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사의 오리무중 트리플 23
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아를 집에 두고 다닐 수 있다면 어떨까? 자아를 가방처럼 집에 두고 다니거나, 경량패딩처럼 차곡차곡 접어서 휴대할 수도 있다면?

하지만 일터의 나와 분리된 자아는 내 맘처럼 착실하게 자아실현을 하기는커녕 저 혼자 살이 찌고 비대해지기도 했다가 저 혼자 상처받아 쪼그라들어 소멸하기도 하는데, 자아가 이건 진짜 삶이 아니라고, 이렇겐 못 살겠다고 도망가버리면…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박지영 작가의 『테레사의 오리무중』은 이런 터무니없는 상상을 뻔뻔하게 현실처럼 이야기하는,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현실적인 소설이다.

『테레사의 오리무중』은 한국 문학의 신인 작가를 소개하는 자음과 모음의 '트리플' 시리즈의 스물세 번째 작품으로, 트리플이라는 명칭처럼 한 권에 세 편의 단편이 묶여 소개된다. 표제작인 <테레사의 오리무중> 외에도 계약직 영우와 미술관 정규직 학예사 정 사이의 관계를 담은 <올드 레이디 버드>, 그리고 평생 실패한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부친 독고 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그의 죽음을 세일즈하는 장남 현수의 이야기 <장례 세일> 이렇게 두 편이 함께 실려있다.

선우은실 평론가는 이 소설들을 두고 노동소설이라는 표현을 쓴다. 너무나 적확한 표현이다. 물론 세상에는 자본주의 시장의 불의에 맞서서 파업을 하거나 투쟁을 하는 형태의 노동문학도 있지만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나는 그런 글도 매우 좋아한다),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투쟁도 파업도 하지 않고(하지 못하고) 그냥 계속 그렇게 살아간다. 바로 그 보통의 노동자들의 삶을 세련된 문체로 풀어낸, 말하자면 요즘 스타일의 노동 문학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노동자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노동과 계급과 자아에 대한 고민과 문장으로 가득차있다. 누군가 내 영혼을 엑스레이로 찍어 해부도를 붙여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영혼을 바늘로 찔리는 것 같은 세 편의 단편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자아실현이란 무엇인가?
소위 덕업일치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좋아하는 일'과 '노동으로서의 일'을 분리하고 싶어 한다. 취미를 '일'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게 되면 결국 취미도 싫어지게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러니까 요컨대 나의 행복한 자아실현은 노동의 영역 밖에서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자아실현. 멋진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은 먹고 살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금전적 재화가 필요하고, 그걸 위해 우리는 노동을 한다. 노동의 대가는 금전으로 환산되지만 모든 인간이 동일한 만큼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노동이 동일한 임금으로 돌아오지도 않는다.

그런데 심지어 우리에겐 시간적 문제도 있다. 일단 일과 자아를 분리시켰으니 일하는 시간 8시간 빼고, 그 외에 소위 말하는 먹고 자고 싸는 시간까지 다 제외하고 남는 여분의 시간……그 몇 시간 안에 자아를 실현해야 한다. 하지만 내 하루 24시간 중에 채 서너 시간이 안 되는 시간동안 실현한 자아를 진짜 자아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루에 9시간을 꼬박 버텨야하는 노동현장과 고작 6분의 1만을 투자할 수 있는 자아실현의 현장, 양쪽 중 나는 어디에 소속된 인간인가. 그 소속이 나를 진정으로 증명할 순 있는 건가.

어쨌든 그것을 진짜 진실된 자아라고 간주하고, '자아야, 너는 안전하게 집에서 자아실현 해, 재미도 없고 힘들고 따분하기만 한 일은 내가 할게'하고 나선 노동이라면 그 노동의 가치는 어떻게 매길 수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는 어떻게 환산되고, 또 어떻게 계급지어지는가. 그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무엇을-어디까지 돈이라는 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렸을 이런 의문에 대해 작가는 자아를 두고 출근하다 자아를 잃어버린 테레사, 비정규직 영우, 아버지 죽음을 팔고자하는 현수를 통해 날카로운 사유를 던진다.

하지만 테레사와 영우, 현수가 처한 상황은 암담하기만 하다. (독자인) 내 삶도 충분히 힘든데, 왜 나는 활자로 쓰여진 또 다른 내 삶 같은 이야기를 읽고 있나 싶다. 정의 소망과는 달리 여긴 해피엔딩도 없고, 그들의 삶 만큼이나 내 삶도 답 없게 느껴진다.

자아 실현이란 터무니없는 꿈 같은 얘기처럼 느껴지고 보통의 삶은 내가 영원히 넘어갈 수 없는 선 너머에 위치해있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존엄도 돈받고 팔아야 하는 처지에 영영 갇혀버린 것 같은데, 이 삶에 진정 탈출구란 없는 것일까?
답도 보이지 않는 이 암담한 질문에 대해, 작가는 정답 대신 주경이라는 인물을 내민다.

'중간관리자'라는 직책처럼 중간지대에 있는 주경은 별의 별 이유로 테레사와 영우와 현수의 삶에 성큼 끼어드는 인물이다. 물론 그녀가 타인의 삶에 관여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테레사한테 삼백을 빌려줘서, 영우가 임시보호하던 고양이를 키우게 되어서, 사정을 잘 모르고 수화기 너머로 현수에게 심한 말을 해서……. 물론 그건 한편으로는 핑계에 불과하다. 그녀는 삼백 쯤 똥 밟은 셈 치고 털어버릴 수도 있었고, 영우의 문자에도 답해줄 의무가 없으니 무시하면 그만이었고, 면접에 안 온 구직자야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알 게 뭐냐고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 한켠에 고인 불편함을 털지 못하고, 보통의 세계에서 도태되고 배제된 듯 보이는 화자들의 방문을 두드린다.

이렇게 살면 안 될 거 같고, 하지만 다르게 살자니 답도 없어 보이고, 뭔가 패배하는 거 같아도…어쨌든 살자고, 살아서 저벅저벅 걸어나가자고 말하는 듯한 인물. 그게 바로 주경이다. 그녀의 존재는 암울해 보이는 현실을 그대로 투영한 소설들의 뒤편에서 작가가 내미는 작은 위로의 선물 같다.

책장을 덮어도 노동의 현실은 지속된다. 나는 여전히 내일 아침 7시에 일어나서 9시까지 출근을 할 것이고, 6시까지 회사에서 일을 하다 퇴근할 것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테레사처럼 소중한 자아를 집에 두고 일을 하러 다닐 수도 있고, 아니면 주경처럼 자아를 잘 접어다가 주머니에 쏙 넣고 다닐 수도 있다. 어쩌면 여전히 내가 노동으로 창출하는 건 현수처럼 팔면 안 될 거 같은 존엄까지도 금전으로 환산한 무언가일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의 곁에는 주경이 있다. 혹은 우리가 주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터무니없이 싱겁게 느껴져도, 대단한 도움이 아니더라도,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연대가 되고 위로가 되는 삶. 그거야말로 이 모순적인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소박하지만 확실한 목표가 아닌가 싶다.

(출판사로부터 서평용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확실히 누추한 일터에 귀한 자아를 데려오는 건 테레사 같은 초짜들이나 하는 실수였다. (중략) 일터에 자아까지 데리고 다닐 필요는 없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이 귀한 진리를 깨우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테레사는 이 모든 영광을 주경에게 돌렸다. 테레사의 말하자면 에피파니의 순간은 주경의 이런 대사와 함께 왔기 때문이었다.
"하라면 좀(한숨), 그냥 하라는 대로 하세요(지친다, 정말)." - P16

정이 영우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건 사실 영우가 곧 떠날 사람이라는 것,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는 임시직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터였다. 어떤 약점을 들켜도 괜찮으리라는 그 임시성이 주는 안도감이 실은, 언젠가 어떻게 다시 만나더라도 영우가 결코 정을 위협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 P73

사소한 불평, 그건 허락된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은 결코 정이 될 수 없었다. 어떤 불평을 하고 어떤 솔직함을 드러내도 그것이 그저 귀여워 보일 정도의 단단하고 이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만이, 작은 불만들을 지저귀듯 털어놓을 수 있었다. - P74

인생은 타이밍이다. 죽음 역시 타이밍이 중요했다. 존엄사라는 건 그런 거였다. 스위스에서 이천만 원, 삼천만 원씩 주고 하는 것도 존엄사긴 하겠지만, 그거야 돈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고, 진짜 존엄사란 이런 거라고 생각했다. 남은 가족이 부담해야 할 장례 비용을 최소한, 30퍼센트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간 안에 죽어주는 것. 조의금 낼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을 때 죽는 것. 살아서 뭐 대단한 영광이나 추억이라도 애써 만들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닐 바에야. - P1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