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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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은 나의 스물 한 살이다.

나의 스물 한 살은 <인간실격>이었다.

타오르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청춘이 버거웠던 

스물 한 살, 당시 나의 악취미는 '관음증'이었다.

악취미처럼 비뚤어지고 뒤틀린 자의 내면을 엿보고 싶었다.

참혹하게 일그러진 누군가의 생을 보며 기묘한 쾌감을 느꼈다.

내가 얼마나 뒤틀리고, 비뚤어졌는지,

무엇이 나를 짓누르고 있는지 세상이 알아주길 바랐다.

 

 

어느날 갑자기 주어진 청춘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틀에 박힌 대학공부는 기대와 달랐다.

특별한 일이 가득할 것 같은 스무살 이후의 삶은

의외로 평범했고, 심지어 아프고 지루하기도 했다.

슬슬 미래에 대한 걱정이 처들어와서 숨이 막혔다.

'어라, 이게 아닌데... 이럴리가 없는데'

나는 황당한 얼굴로 청춘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내겐 청춘을 감당할 힘이 없는게 아니라

청춘을 감당할 방법을 몰랐을 뿐이었다.

내게도, 청춘은 처음이었으니까.

 

동네 도서관에서 처음 만난,

'다자이 오사무'는

못나고 어리석었던, 내 청춘의 단면이었다.

 

 

"부끄러움이 많은 생애를 살아왔습니다.

恥の多い生涯を送ってきました。自分には、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人間の生活というものが、見当つかないのです。

 

'죽고 싶어 견딜수가 없다는' 그의 생각들이

허세와 자의식으로 무장한 내게는 영웅처럼 빛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치졸하고 비겁하게 내 안으로만

숨으려고 했던 청춘의 일면을 들킨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병약하고 감수성 여린 요조에게 세상은

도저히 진입불가한 벽으로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요조는 제대로 된 사랑이나 이해를 받은 적 없다.

'사랑'이란 말은 요조에게 사용 불가능한 단어일 뿐.

 

아픈 어머니와 권위적인 아버지.

요조에게 관심없는 형제들, 몹쓸짓을 하는 하녀들.

인간에 대해 극심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던 요조는

어린 나이에 인간과 세상의 무시무시함을 일찍 알아버렸다.

그런 요조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바로, 자신과 남을 속이며 익살을 떠는 것.

그는 본심을 감추고 익살스런 흉내를 내보며 다가가지만

 도저히 발 딛을 수 없는 세상에 좌절감을 느낀다.

 

이 좌절감은 그의 생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그에게 세상은 치명타, 내려놓아야 할 짐, 요괴. 불안. 암흑.

술, 담배, 여자로 피폐한 삶을 살다가 여자와 동반자살을 시도하고.

죽지 못해 살아 남은 후에도 자살미수, 음주, 마약으로 타락한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이미 인간의 자격을 잃었음을 깨닫는다.

 

 

<인간실격>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 사회가

맞닥뜨려야 했던 무력하고 황량한 시대상황과 맞닿아 있었다.

참혹한 전쟁 패배 앞에 인간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자조하는 분위기에서

이 소설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일그러진 쾌락을 주었던듯 하다.

패전 후의 암담한 현실이 불러온 세계관의 붕괴, 윤리관의 혼란.

참혹하게 망가려가는 청춘의 퇴폐 소설인 <인간실격> 통해

일본의 청춘들은 해방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했던 것이다.

 

 

"인간실격(人間失格).

나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이 문구를 읽고

소위말해 어찌나 간지(?)나던지.

청춘을 표현하는 최고의 문장이라고 생각했고

한동안 다자이오사무 문학에 심취했다.

그 때 난 스물한살 문예창작과 학생이었다.

 

5년 후,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자의식, 이기심, 자존심이 전부라 우울하다 징징거렸던 내가

생계를 위해 가식과 위선의 가면을 쓰고 세상 한 가운데 있더라. 

나름대로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보려 애썼으나

결국은 모든 것으로부터 배반당한 패배자 요조와 다르게..

 

 

나는 패배자가 아니었다.

 

 

두렵고 무시무시한 세상으로 들어와

요괴같이 허위의 가면을 쓴 인간들과 어울려

나름 어울려, 잘 살아가고 있었다.

요조처럼 무너지며 실격 당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으나,

어찌되었든 버텨내고 참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나는 더이상 스물 한 살 치기어린 청춘이 아니었다.

내 삶, 나의 꿈을 책임지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간실격을 다시 읽었다.

처참하게 무너지는 처참한 청춘이 보기 버거워 힘들었다.

이상했다. 한 때 인생도서라 여겼던 책이 지금은 읽기 버겁다.

요조가 가엽고 어리석다.

나는 <인간실격>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하며

책장을 덮었다.

 

"안녕, 요조. 나의 청춘이었던 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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