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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 다시 읽기 - 어제의 소설로 오늘을 치열하게 읽어내고 싶은 당신에게
김형준 지음 / 도서출판 해오름 / 2024년 1월
평점 :
중고등 학생들에게 한국 대표 소설을 읽히기 어렵다. 학생들과 시대와 환경이 너무나 다른 배경을 가진 소설을 읽고 이해하는 것도 힘든데 거기에 생각을 논하기도 쉽지 않다. 또한, 가르치는 선생님도 소설을 어디에 초점을 맞춰 접근해야 할지 몰라 평이한 방법으로 등장인물 소개, 대사, 내용 분석등으로 작품안에서만 수업을 진행한다.
이부분에 뭔가 대안이 필요할 때쯤 저자의 강의와 이번에 나온 책을 통해 어느 정도 목마름이 해소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한 '어느 정도'는 나에게 문제와 책임이 있다. 즉, 많은 함의와 방향을 제시했음에도 소화하지 못한 나의 한계치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이번 책으로 방향을 잃었거나 초점을 어떻게 맞춰서 해야할지 모를 때는 길잡이 삼아 진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다시 읽기에서 새겨듣고 적용할만한 문단을 찾아 수업에 활용해보려고 한다.
1. 현진건 [운수좋은 날] - 불행은 어디서 오는가.
운수좋은 날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대중문화의 소재로 많이 쓰이면서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반면 작품이 가진 풍부하고 깊은 의미가 단순화하고 희화화 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다양한 원인들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한다. 작품 속에서 김첨지의 삶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교과서적으로 보면 '식민지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하나의 원인으로 김첨지의 불행이 설명될 수 있을까?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김첨지는 그 불행을 겪지 않았을까? 김첨지를 직접적으로 불행하게 만든 것은 인력거꾼이라는 불안전한 고용, 그리고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열악한 사회제도.더 나아가 이 사회적 모순에 대해 대자적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병적인 대응에 매몰된 개인의 태도를 꼽을 수 있다. 12~13
시대상의 어쩔 수 없는 박제화된 김첨지가 아닌 현실에서의 김첨지를 찾아보자는 것으로 해석한다.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은 일제의 토지정책으로 땅을 빼앗기고 서울에 빈민으로 살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원인은 뚜렷하고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해방이 되서 지금 현실은 어떠한가? 현실의 김첨지는 사라졌을까? 인력거꾼은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자영업자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자영업자는 어떠한가 말이다.
2. 전광용[꺼삐딴 리] - 능력주의와 반민족주의
전광용의 꺼삐딴 리는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이후까지 권력의 입맛에 따라 변신을 거듭해 온 지식인의 모습을 그린 단편소설이다. 뛰어난 어학실력과 의학적 능력을 오로지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주인공 '이인국 박사'의 모습은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하는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꺼삐딴 리를 마냥 반면교사라 삼아 비판의 대상에 쉽게 오를 수 있을까? 현재 우리 사회에 능력주의에 맞춰 보면 그는 굉장히 유능하다. 살기 위한 치밀함과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처세술도 대단하다. 날카로운 눈으로 누가 권력을 가진지 발견하고 접근한다.
저자는 여기서 다른 한편으로 매우 무능하다고 말한다. 긴 흐름으로 역사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우리나라가 해방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한번도 권력이 되거나 자신이 원하는 시대를 만들지 못했다. 그저 권력에 빌붙어 생존하는데 혈안이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도 무능하다.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자신의 딸에 행하는 모습도 그러하다 결국 이인국 박사가 유능한지 무능한지는 '능력'을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86쪽 참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과 구조가 우리에게 무엇보다 '능력'을 키울 것을 개인적 성공을 위해 사용할 것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존재해야 마땅한 무엇을 자주 망각한다. 개인의 양심, 역사의식,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일 수 있다. 그러면에서 이인국박사는 삶을 향해 살아가는 모습에서 무능하다 할 수 있다.
3. 조세희 [뫼비우스의 띠] - '백만년 후의 세계'를 위한 난쏘공 읽기
뫼비우스의 띠는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연작소설 중에 한 단편이다. 고등학교 교실을 배경으로 수학선생님이라는 화자를 통해 비교적 직접적으로 주제 의식을 밝히고 있고 다른 하나는 '앉은뱅이'와 '꼽추'가 살인을 저지르는 내용이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은 '앉은뱅이'와 '꼽추'가 살인을 저지르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열쇠이며 이 두내용을 연결하는 것이 다시 '뫼비우스의 띠'라는 개념이다.
꼽추와 앉은뱅이가 한 사람을 살해하는 장면과 굴뚝에서 하얀 피부를 그대로 간직하여 나온 아이와 검은 재를 입혀 나온 아이의 사례처럼 불행한 타인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행복할 수 있는 개인은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타인의 불행은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행복한 삶을 누리는 인간은 분명 어딘가 결핍된 존재이며 그러한 존재가 느끼는 행복은 분명 왜곡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내 얼굴만을 씻는다고 '검은 얼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굴뚝'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게 뫼비우스의 띠가 갖는 궁극적인 의미라고 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아버지'는 '백만년 후의 세계'라는 책에 탐독한다. 그리고 무거운 쇠공을 던지고 사라졌다. '백만'이라는 머나먼 세계는 지금 당장 우리에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머나먼 시간이라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아니다.
항상 이 책을 읽을 때 현실에 벌어지는 사건과 한발 나아지는 상황이 아닌 것에 좌절 할 때 저자의 난쏘공 해석을 읽고 조금은 희망이라는 단어도 떠올려봤다.
275쪽- 그러므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을 읽고 있는사회에는 절망만이 아니라 희망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조세희 선생님,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여전히 우리는 굴뚝 안에 있기에 선생님의 소설을 여전히 읽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아직 '백만년 후의 세계'를 포기 하지 않는 까닭도 여전히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